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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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읍] 개울을 베고 자는 곳에 지은 서당, 침계재(枕溪齋)와 침계정(枕溪亭)

개울을 베고 자는 곳에 지은 서당, 침계재(枕溪齋)와 침계정(枕溪亭) ▶ 대반마을에는 개울가에 침계정이란 정자가 있다. 그 자리는 한국전쟁 무렵까지도 아이들이 공부하는 침계재란 서당이 있었다. 서당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정자가 들어섰는데, 침계재의 역사와 뜻을 이어받아 침계정이란 현판을 내다걸었다. 아 요것을 잉, 비개 침(枕)자 잉, 시내 계(溪)자, 요 자는 집 정(亭)자재? 그란가 저것이 집 [정]잔가? 내가 왜 저것을 했냐 그라면 저거 내가 해 논 거여. 내가 하자네 부락에서 했는디 내가 주동을 해서 했어. 여가 지금 요 냥반[앞에 할머니를 손짓하며] 할아버지제? 시할아버지. 그 냥반이 아까 이 냥반 보고 잠깐 뭔소리를 했는디, 대접장이여, 그전으로 말하면 대접장이 지금으로 말하면 선생님, 한문..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마을사람들을 보호해 준 개울가 팽나무

마을사람들을 보호해 준 개울가 팽나무 ▶ 어느 여름날, 모내기도 끝나고 아이들은 팽나무에서 놀다 물가에서 쉬던 소들을 몰고 풀 먹이러 가고, 어른들은 팽나무 그늘에서 낮잠 자다 논매러 간 사이에 팽나무가 쓰러져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은 마을이 화목하고 주민들이 선해서다. 마을이 좋다는 것이 부자로 잘 살고이 인물이 나서 좋은 거 아니에요. 다아 그 주민들이 선하고 하기 때문에 저런 나무 같은 저런 식물들도 다 보호를 해줘요. 여그가[정자 아래쪽 개울가를 가리키며] 그 전에 시방 이이 몇 백 년 된 나무지만 굼팽나무라고 팽나무, 히어넌[두 팔을 넓게 벌리며]나무가 있었어요. 있었는디 당시에는 여그가[앉아있는 정자를 두 팔로 둥그렇게 그리며] 침계재를 뜯어불고 맨 바닥이었거덩. 그면 일꾼들이, 글때 농부들이..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대반마을 풍수와 몰곳치 방죽의 유래

대반마을 풍수와 몰곳치 방죽의 유래 ▶ 대반마을은 마을 뒤 무수봉, 앞으로 젓대봉이 있어 풍수로 명당자리여서 수많은 풍수 보는 사람들이 찾아왔으나 명당을 찾지 못해 몰곳치라 불렸다.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임씨 후손들이 고약해서 불이 나 집이 전부 소각해버리자 60여 년 전 학선 씨란 분이 마을에도 베풀며 조그만 방죽을 하나 파거라, 하시면서 마을이 골고루 평화롭게 산다. 으, 유래가 지금 여그 여 비, 비쌓고 있는 저가 저 비요. 비가 효자 일자, 호는 예조곤이고 그 냥반이 임씨요, 시방, 우리 할아버지 10대조. 그란디 여그 터가 이뤄진 재가 삼백 한 육십년 되야. 그러며는 평장 경주 김씨, 덕제 모두 거리 경주 김 씨들이 백년 후에 들어왔어, 여그 여 우리 할아버지 보덤. 그래갖고 그 이 할아버지가 ..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일본인 아이들이 다녔던 장흥서초등학교

일본인 아이들이 다녔던 장흥서초등학교 ▶ 장흥서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충성수포를 포함한 가게들은 말 사료 창고였고 동명목재 자리는 말을 기르는 기마병이 있었다. 지금 여 학교도[장흥서초등학교를 가리키며] 보믄은 옛날에는 탱자나무 울타리였어요. 울타리가 탱자나무로 돼있고 여그 앞에는 물론 비포장이었고. 그라고 여가 장흥서는 강진선로로써는 제일 큰 도로였고, 그 당시에는. 23번 국돌거야, 아마 정확하게는 모른디. 근디 현재는 천변도로가 국도로 바꼈고 여그는 지방도로 맞춰줬어 현재. 인자 칠거리가 터미널이 있었고. 그라고 인자 칠거리가 터미널이 있고 할 때는 요쪽이 완전히 상권이 활성화되어 있었고. 경찰서 여깄고 법원 여깄고, 각종 은행이 쩌그가 칠거리 쪽에가 다 있었고. 항..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한국전쟁 때 대나무로 엮어 만든 장흥읍성

한국전쟁 때 대나무로 엮어 만든 장흥읍성 ▶ 한국전쟁이 나자 연로하신 아버님을 대신해서 아홉 살 먹은 내가 마을 초소 보초를 섰다. 형님은 대나무를 가져다가 장흥읍성의 방어막을 쳤다. 6·25 당시 인자 나이가 어렸잖아요. 그럴 때 아버님이 인자 연세가 많에 가지고 내가 인자 초소, 그때 인자 연락이 되거든요. 초소가 여그서 대부등에 여가 있고 여가 초소가 있고.[손으로 마을 앞 동쪽 서쪽을 가리키며] 그래서 여기 나와서 내가 인자 아버님 대신에 초소를 슨 기억이 나요. 그때 아홉 살이나 묵었었을까, 그랬을꺼요. 아마 6·25가 나 가지고 한 이삼일 되았다고 그랬는디. 그래가지고 인자 우리 형님이 쩌그 장흥읍 산성에, 읍 뒤에가 산성이 있어요. 대로 거 죽창을 막어 가꼬 쩌리 시방 사랑니(장흥읍 사안리)..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아버님이 만난 호랑이와 범바우

아버님이 만난 호랑이와 범바우 ▶ 아버님이 젊었을 때 마을 모시밭에 큰 개만한 호랑이를 만나서도 아무 탈이 없었다. 마을 뒷산에는 사람이 범 등에 올라탄 형상인 범바우가 있어서 마을에 큰 환란이 없었다. 그게 참 옛날 얘긴데, 제가 우리 아버님한테 듣는 얘기예요. 옛날에는 지금 현재 집 있는 데가[마을 쪽을 가리키며] 모시밭이 돼있어요. 그러는데 거기에서 우리 아버님이 우리 인자 사둔을 만날라고 맨 마주막 집을 찾어갔어요. 가는디 무슨 개가 크은 놈이 있더래요. 그래서 이쁘다고 쓰다(듬어) 보닌까는 호랑이였어요. 예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장대하시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지요. 상댕이 건강하신 분이였지요. 범바우는[마을 뒷산을 가리키며] 현재 지금 녹음이 짙어져가지고 있으닌까 그렇제, 완전히 행태를 보며는 ..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밤이면 횃불 들고 쪽대로 고기 잡아 먹던 연화금뜰이 있는 연동

밤이면 횃불 들고 쪽대로 고기 잡아 먹던 연화금뜰이 있는 연동 ▶ 연동마을은 사안 2구로 강변 밭이 모래사장이다. 옛날에는 밤이면 횃불을 들고 강에 나가 잠자는 물고기들을 쪽대로 잡아먹었다. 한문으로 여가 연꽃 [연]짜여, 연꽃. 여가 어디가 연꽃이 있었닥합디다. 그랑께 인자 우리는 그란지만 알어. 어디가 뭐 그런 것이 있엉능가 어쨌능가. [연화, 쩌그 모퉁이 산에 쩌그 어른들이 말하시고 그란디. 여가 연화 꽃이 좋고 여짝으로 더가믄 인자 연화 꽃이. 쩌그 저 저 건네 뜰이 연화금이거든, 쩌그 저 보인 데가.] 그랑께 쩌그 연꽃이 있었드락 합디다, 전에 옛날에. 그래갖고 여그 보고 연화금이라고 연동이라고 그라고 지었닥합디다. - (옛날에도 도로가 이렇게 있었어요.) 네, 나 알기로는 옛날부터 있었어라, ..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한국전쟁 때 헤어졌다 다시 만난 가족

한국전쟁 때 헤어졌다 다시 만난 가족 ▶ 강원도 화천이 고향인 할머니는 열한 살 때 한국전쟁을 겪는다. 폭격 속에서 겨우 살아남아 부모형제와 헤어진 할머니는 여러 고초를 겪으며 장흥 사람을 만나 결혼해 순지마을에 살게 된다. 그 후 17년이 지나 소식을 알고 장흥에 찾아온 큰 오빠를 만나고 강원도 화천 고향마을로 가 어머니, 형제들과 해후한다. 그 전에 6·25사변때 군인들이 이 밑으로 막 내려왔어요. 막 쳐내래와갖고 여기 군인들이 마주쳐져 버렸어요. 그랬는디 인자 막 중국군인들도 많고, 인자 한국군인도 있고 미국사람도 있고 일본사람도 있고 섞어졌어요. 그랬는디 우리오빠는 쩌어 산골짜기로 그 전에 말로 회한다고 올라갔어요. 올라가고 있는디 우게서 비행기가 정찰비행기가 가마니 가마니 돌아댕기더라고 살살 돌..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남문 밖 나뭇꾼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남문 밖 나뭇꾼 ▶ 어느 날 산골 성불리 수인산으로 남외리 사람들이 땔감나무를 하러 왔다. 나무를 한 짐씩 해서 집으로 가려고 지게를 짊어지고 내려오는데 호랑이가 한 사람을 물어가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가니 호랑이는 도망가고 물려간 사람은 죽어있었다. 그 전에 쩌그 남외리라고 있어, 저 남박계(남문 밖에). 그 사람들이 여가 지금 여가 산골이라놔서, 순전히 그때는 지게만 질머지고 나무를 해다가 때코, 또 시장에다 팔아서 묵고 살고, 자 이런 세대여. 그런디 열 둘이가 이렇게 딱 나무를 지고 내론디 한 짐씩을 해가꼬 지고 내러와. 집이로 와 인자 와. 온디 호랭이가 그냥 거 가운데 사람을 한나 물고 그냥 돌아가부렀어, 저기로. 산비탈길로 돌아강께 전부 나뭇짐을 받쳐놓고 쫓아간다..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일제강점기, 비행기 기름하려고 공출해간 관솔기름

일제강점기, 비행기 기름하려고 공출해간 관솔 기름 ▶ 일제강점기 말에 목화와 함께 소나무 관솔 기름을 만들어서 공출로 바쳤다. 일제는 심지어 정해진 양을 가져가고도 또 와 뒤져서 나오는 목화뿐 아니라 집안에 있는 개도 잡아서 가져갔다. 일제 때 그랑께 인자 그 비행기 지름 한다고 그거 인자 간솔지름을 내라고 해. 간솔, 간솔만 따다가. 그라믄 인제 간솔만 되제. 소나무 올라가가꼬 톱으로 짤라가꼬 간솔만 차곡차곡 항아리에다 쟁에. 그래가꼬 그놈을 인자 그 항아리 가새다가 황토를 이개가꼬 빼엥 돌려서 볼라야돼. 볼라가꼬 앙재 거름을, 인자 방에 찍은 앙재 그놈을 슬슬 펴서 인자 이놈을 한 메칠, 한 사날 때면은 그 간솔이 지름이 나와 가꼬 그 항아리로 하안나 되어가꼬 있어, 그 간솔 지름이. 그래가꼬 공출하..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시암이 두 개있는 가시암, 병천(並泉)

시암이 두 개있는 가시암, 병천(並泉) ▶ 마을에는 시암이 두 개 있다. 가세 모양을 닮아서 가세암, 가시암, 병천이라고 했다. 지금 우물 하나는 어린애가 빠져죽어 없어졌고 하나가 남아있다. 병천이란 이름은 이 마을에 옛날 정묘년 한 이삼백 년 전 정묘년 부터 병천이라고 부르게 되아 있는데. 그 병천이라는 이름을 왜 지어졌는고는 처음에는 가세암이라 고 했습니다, 가시암. 가시암이라고 가세가 손잡이가 두 개가 있잖아요. 그래서 그 우물이 저 우게가 우물이 하나는 있고, 지금 하나는 없어졌습니다. 거 우물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그 우물에 어린애가 한나 빠져서 죽어 가꼬 그 우물을 없앴어요. 그라고 한나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가세암이란 것을 다시 번역을 해가꼬 아우를 [병]짜를 써서 샘이 둘 있다, ..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문화당 서점에서 일어난 일

문화당 서점에서 일어난 일 ▶ 서점을 하다보면 책도둑이 많았다. 한번은 유치까지 책도둑(학생)을 잡으러 갔다가 그냥 돌아온 일도 있었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주로 학교선생님들이 단골로 많이 오셔서 사랑방 역할도 했다. 한때는 장흥 10개 읍면에 서점이 모두 있어서 책을 보급했고 심지어 보성, 강진, 영암, 금당, 금일도까지 가마니로 책을 싸 새내끼로 묶어서 지나는 버스로 배달했다. 6·25때 아버님은 아마 6·25전에 서울을 가셨는가는 모르겠는데 전쟁 중에도 학교가 운영이 되고 교과서가 보급되고 그랬는데. 6·25전쟁 때는 일시적으로 대구 쪽으로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가 이전을 했고, 보급을 할 때는 부산에서 배로 장흥 수문포로 왔다고 그래요. 그래서 수문포에서 책을 가져오시기도 하셨고 그런 와중에 다..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문화당 서점의 역사

문화당 서점의 역사 ▶ 문화당 서점은 1945년, 지금은 돌아가신 최인창씨가 시작하여 지금은 아들 최경석 씨가 72년째 운영하고 있다. 장흥에도 70년대에는 진학서점, 문우당 같은 서점이 있었으나 지금은 문화당과 상문당, 두 개의 서점이 있다. 우리 서점은 저로 보면 고모할머님부터 시작을 하셨는데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여기저기 기록해놓으신 걸 보면 아버님 스스로 서점을 직접 운영한 것이 아마 1945년, 46년인가 싶어요. 그래서 현재 이 자리가 1979년도에 새로 지어가지고, 원래 있던 자리를 새로 지어서 했는데 그때가 79년도니까 그 이전, 79년도 이전의 상황이 35년 됐다고 아버님께서 기록을 하신 걸 보면 1945년, 46년 이렇게 아버님 스스로 사업을 시작하셨던 것 같습니..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웅장한 소나무가 서있던 석대동산

웅장한 소나무가 서있던 석대동산 ▶ 예전에 웃석대에는 웅장한 소나무 여러 그루가 서있는 동산이 있었다. 언젠가 모두 베어버려 묵정밭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다닐 때 남외, 충렬, 교촌마을 아이들이 모여 놀고는 했다. 지금 아릿석대에는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근게 지금 우리가 지금 볼 때 이 석대, 이 동산 석대동산이 지금 이렇게 죽정밭으로 된 게 아니고 대가 없었어요. 그때는 일부 이쪽에만 좀 있었제. 마을 쪽으로만 있었제. 그때는 이 한 몇 백 년 된 소나무들이 한 열 몇 그룬가가 참 웅장하게 있었는데. 6·25 닥쳐가지고, 아니 해방 후 또 6·25 후로 어떻게 해서, 마을에서도 주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 몇 백 년 된 소나무가 소멸 되아 브렀어. 그 후로부터 완전히 이 동산이 댓밭으로 그..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고싸움, 서부가 이기면 풍년 동부가 이기면 흉년

고싸움, 서부가 이기면 풍년 동부가 이기면 흉년 ▶ 예전에 장흥읍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정월 대보름이면 석대동산 넘어 도로변에서 고싸움을 했다. 고싸움과 줄다리기를 해서 서부가 이기면 풍년이 들고 동부가 이기면 흉년이 든다는 속설이 이어져왔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장흥읍에 과거에 정월대보름이면은 동부와 서부가 나나져가지고. 그 어르신들이 근 한 달 동안 곳줄을 마을별로 준비를 해가지고, 이 곳줄을 취합을 해서 정월 대보름날이면은 바로 이 석대전 너머에서 동산 너머에서 도로변에서. 물아래 고 물위에 고. 동부 서부가 고싸움을 해가지고 동부가 이길 때는 풍년이 든다했든가, 그랬든가 어챘든가. 우리가 암꼬, 이 서부는 암줄이고 동부는 수줄이고. 그래갖고 이 고싸움을 해가지고 서부가 이기면은 그 해 풍년이..

장흥읍 2017.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