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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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읍] 사장나무 아래 이백근 들독

사장나무 아래 이백근 들독 ▶ 마을 사장나무 아래에는 지금도 들독이 있는데 지나가던 강진사람들도 들어보고 여름이면 쉴 참에 들고는 했다. 경지정리하면서 도로 이쪽으로 났어. 여그 걸어댕김서, 강진사람들이 요리 해서 자울재 올라가면서, 쩌 길이 땅 밑으로 저 화단에 그리가 길이 있어. 사장 저그가 들독이 있는디 그 들독을 전부 맨마니보고 들어볼라고 그라고 젊은 사람들이 들고 했다고 그래. - (들독이 지금도 있어요?) 있죠. 아 그때 우리는 안 들어봤어. 스무 살 와 갖고 객지생활 한다고, 여름이면 모다 초군들이 앉아 놀면서, 난 안 들어봤어. 그걸 보듬고 요러꾸 보듬아서 냉기고 그랬다두마는. 그란께 우리동네 산 사람이 누가 들어서 뒤로 냉긴 사람이 있다 그 돌을. 한 200근 될 거여, 보기에는 그래도...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강진과 장흥 경계에 있는 호랑이바우와 사자산

강진과 장흥 경계에 있는 호랑이바우와 사자산 ▶ 호랑이바위가 있는 사인정은 장흥과 강진 경계인데 동쪽으로 큰 사자산이 있어 호랑이바위가 맥을 못춘다. 저것 보고 말허자면 호랑이 바위[송암마을 사인암을 가리키며], 사인정이라고 그란디. 왜 저가 사인정이라고 하느냐 하면 사인벼슬 하신 분이 아 저 거시기 했다 그래서 사인정 전각이 있어, 사인정. 쩌기 저저 강진하고 장흥, 거그도 등(산등성이)으로 내려옴시로 전각이 있는디 그 전각은 거가 경계선이여, 강진하고 장흥하고. 그래 가꼬 말이 그 전에 장흥서 밥 해가꼬 강진 가 묵고 강진서 밥 해가꼬 장흥 가 묵고, 방이 부엌하고 방하고 틀린다 해서 그런다고…. 그라고 쩌그, 호랑이 바위라고 그란디. 저 사자산이 있어 가꼬, 이 바위가 맥을 못춘다, 쩌그 저 금산가..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금안마을 유래와 장군바위

금안마을 유래와 장군바위 ▶ 황씨가 먼저 터를 잡았고 그 뒤 영광 김씨가 자자유촌 살아온 마을로 지형상 장군바위와 말안장 형국이라 금안(金鞍)이라 불렀다. 원래는 황씨들이 300년을 살았다 한단디 설화 내용이 아예 근거가 없어요. 그래서 저쪽 사장나무가 그 무렵에 아무케나 5~600년 나머 됐다고 봐야 되는데 그 내용은 아는 게 없고. 근데 유래에 대해서 보며는 영광 김씨가 여그 묵촌에서 오셔가꼬 묵촌에서 이리 오셔가꼬 터를 잡았는데 영광 김씨 자자유촌이고…. 여기 마을 지형 상 금안리라 그랬는데 쇠 금(金)자 안장 안(鞍)자 금안리라고 그랬는데 지금은 기만리 기만리 그래요 발음하기 좋게. 행정구역 상 평장 2구이고. 왜 금안리라고 그러냐면 쩌어[마을 뒷산을 가리키며] 이 등에 쩌그 올라가믄 장군바위라고..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싹바위와 닥바위

싹바위와 닥바위 ▶ 마을 앞 들판에는 닥바위와 병아리바위가 있고 이를 노려보며 마을 뒷산에는 삭바위가 있다. 지금도 마을에서 닭을 키우면 삵이 와서 물어간다. 요 위에 가면 바로 대밭 우게가 싹바위라고 큰 바위가 있어.[마을 동쪽 뒷산을 가리키며] 싹바위, 쌀가지 삭바위 삭바위 라고. 요즘에는 삵이라고 하든마, 쌀가지를. 싹바위 라고 있고 이 앞에 바위, 논에가 바위 있는 거 저기 닥바위라고 그라고.[마을 앞 서북향 논을 가리키며] 그래서 그 전에는 그 부근에가 사람이 못 짊어질 정도로 큰 바위가 많이 있었어. 그래서 병아리바위라 그랬는데 그 병아리바위를 저 논 주인이 싹 깨서 인자 캐내 불고 묻어 불고 파서 궁글러버리고 그래 가꼬 그게 없어져 부렀어. 그란디로 저 바위가 싹바위가 벌어졌어. 그렇게 벌어..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인공시절 장동 산골에서 살던 새색시

인공시절 장동 산골에서 살던 새색시 ▶ 인공시절 장동면 산 속 새색시의 집안은 큰 부자라서 낮에는 경찰들이, 밤에는 반란군들이 많이 찾아와 돈과 이불과 쌀과 먹을 것을 내놓아야 했다. 장동 산골에서 1년을 살고 집을 뜯어와 월평에 다시 짓고 살았다. 전에 우리 삼대가 살았어 시집 와서, 삼대가. 삼대자네 나 사대 있는 데로 왔어. 조부님이 둘입디다. 함머니는 그 해에 돌아가시고, 봄에 시집 왔는디 열아곱에 시집 왔는디, 함머니는 돌아가시고 할아부지가 두 분이여. 우리 증조함머니는 돌아가시고 나 오든 그해 봄에 돌아가겠다, 돌아가시고. 하네는 두 분이 제겠써. 그래가꼬 전에 그라고 그 냥반들 모시고 살었제. 밥상을, 끄니믄 한 끄니믄 밥을 상 일곱 석을 놔아. 각까이 각까이. 전에는 그러코롬 저금 저금 다..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서남지구 전투 경찰대와 육십명재

서남지구 전투 경찰대와 육십명재 ▶ 한국전쟁 때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5연대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지리산 육십명 재는 전라북도 장수와 경상남도 함안의 경계인데, 육십명 이상 지나가야 피해를 안 입는다고 옛날부터 부르던 이름이다. 그때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파리 목숨보다 못 했다. 내가 17살 때 여그를 왔어. 해방된 뒤로제. 그렇게 마니는 안 살았제. 그렇제 농사제. 여그는 농사밲에 없어 원래가. 나는 인자 농사 짓자네, 인자 중학교 중퇴를 해가꼬 서남지구 전투경찰대를 갔어, 내가. 남원 서남지구 전투경찰대에 있어가꼬 지리산에서 그 아주 고생 많이 했제. 공비토벌. 그랄 때는 고생했다는 얘기를 말 할 수가 없어. 아조 에로왔제. 하아 거그는 그랄 때는 그 그 사람들은 따발총을 갖고있겠지 원래...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제암산 제바우와 사자산 시루바우, 사자산 여우와 늑대

제암산 제바우와 사자산 시루바우, 사자산 여우와 늑대 ▶ 제암산 상봉에는 덕석 삼십 장을 깔 정도로 넓고 큰 제바우가 있고 사자산에는 시루같이 생긴 흔들바우가 있다. 사자산에서는 여우와 늑대가 살았다. 제암산 제일 상봉에 제바우가 큰 바위가 있어요. 아니 그 올라가믄 그 이 좀 울뚝불뚝하기는 해도 거따가 물이 고인데도 있고. 그래가꼬 거기 올챙이가 산 데도 있고. 그리고 그 얼마나 바위가 거자 이 근방 또랑이나 될꺼요.[정자나무 근처 전체를 손가락으로 둥글게 그리며] 굉장히 넓어요, 제암산 그 꼭대기 거그를 올라가믄 굉장히 넓어요. 덕석을 삼십닙를 깐다 해쓰까. 하여간 겁나 커, 범위가 겁나 넓어, 꼭대기 올라가믄. 거그서 올라가서 점심도 묵어 보고 거기서 인제 나무 비닌까요. 나무 비다가 점심 묵고 올..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달이 떨어진 자리, 월락평(月落坪)

달이 떨어진 자리, 월락평(月落坪) ▶ 언젠가 일지스님이란 분이 마을을 지나다가 달이 떨어진 자리라 해서 월락평이란 이름을 지어주며 만 호수가 살 것이라고 했다. 옛날에 일지스님이라는 중, 그 명도사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아 여기가 만 호가 들 자리다, 만 호수, 호수로 해서 만호가 될 자리다.” 이렇게 말을 하고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만호가 되기 위헌디, 그 분이 월락평이란 이름을 줬어요, 이 마을을. 월락평이란 마을을 이름을 줘가지고. 달 떠러진 자리. 달 월(月)자, 떠러질 락(落)자, 들 평(坪)자. 달 떠러진 자리라 해 갖꼬 만 호를, 달 떠러진 자리를 채울라며는 만호가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각 처에서 이 달 떠러진 자리를 찾기 위해서 각 처에서 모여드렀써..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가뭄에 억불산에서 지낸 기우제(祈雨祭)

가뭄에 억불산에서 지낸 기우제(祈雨祭) ▶ 날이 가물어 비가 안 오면 각 마을에서 푸나무를 해가지고 억불산 며느리바위 상봉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가무러 가꼬 날이 가무러부러 가꼬 비가 안 오며는 인자 비를 빌기 위한 빌 [기]짜 기우제거든. 비 [우]짜 그래가꼬 기우(祈雨)젠데. 한 번인가 봐러 가 본 적이 있어요. 그래가꼬 거기를 가며는 전부 나무를 해갖꼬 올라가드만요. 나무를, 푸른 나무를 여기서 낫으로 비어가꼬 올라가요. 그래가꼬 장흥읍에서 주최를 해가꼬 읍장이 아마 주관해쓸 거예요. 읍장이 주관을 해가지고는 인자 올라가면서 그 푸나무 그걸 해가지고는 거기다 풀을 엉거서. 그랑께 각 마을에 전부다 모이닌까 굉장히 나무가 많지요. 나무가 수십 뭇, 그렇게 나무가 많이 든디. 그 나무를 전부 그 기우제..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월산재와 연곡서원 성암 선생님

월산재와 연곡서원 성암 선생님 ▶ 월평마을 출신 성암 선생님은 연곡서원에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추렴을 해 월평마을에 비를 세웠다. 우리는 마을 서당 월산재에서 글을 배웠다. 하지만 여자들은 편지 쓰고 연애한다고 서당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월산재는 옛날에 우리 마을에 서재를 했는데, 마을과 같이 마을 생길 때부터 서재가 있었어요. 그런디 그 서재를 월산재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로고 그 월산재에서 따온 이름이 지금도 월산경로당이라고 월산, 월평마을 경로당을 월산경로당이라고 하지요. 그런디 월산재에서는 거어 선생님이, 성암 선생님이라는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장흥에서는 제일로 글 잘하는 그런 유명한 선생님이었어요. 근디 그 냥반은 월산재에서는 서재를 선생님을 안 했고, 월산재는 신..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도깨비불과 귀신바우

도깨비불과 귀신바우 ▶ 어느 날 시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읍에 사는 친척에게 돼지고기를 주었는데 도깨비가 안양 가는 미륵댕이로 데려가 고기를 빼앗아 갔다. 귀신바우를 지날 때 두 손을 움켜지고 씩씩하게 걸으니 도깨비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마을 앞에서 모다 어른들이 앙거서 노라요. 그라므는 비가 올라 갈므는 쩌어 안즌멀데가 소나무 서너 개 있는 데가 마악 도깨불이 뻔득뻔득뻔득뻔득뻔득 마니 그래요. 그라믄 그 뒷날 장에 감서 거리 가블믄 소나무만 있제 도깨비는 한나도 없고. 인자 언제 한번은 우리 시아버니 바깥 지사를 지냈제. 읍에 사는 우리 친척이 왔는디 자전거를 타고 왔더라고. 아니 자전거를 타고 왔등가 기앙 왔등가 모르것네. 그래서 인자 디아지고기가 많에. 그래서 디아지고기를 짤라서 쌩 것을 싸줬제...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고려 때 장원급제한 위씨 삼형제가 공부해서 장원봉(壯元峯)

고려 때 장원급제한 위씨 삼형제가 공부해서 장원봉(壯元峯) ▶ 고려 때 위원개 등 삼형제가 장원봉 밑에서 공부하여 장원급제를 했다 해서 장원봉이라 이름을 지었다. 지금도 형제들이 먹었던 통샘 물이 흐른다. 듣는 얘기로는 이 고려 때 위원개 씨 그분께서, 관산 위 씨잖애, 장흥에는. 근데 그 삼형제 분이 쩌기서 장원봉 밑에서. 그때는 인제 고려 때는 장원봉이라 했는지 모르지만은 급제 장원급제를 했다 해서 장원봉이라 한 거여. 위원개라는 분이 장원급제를 했어. 장원급제를 해가꼬 인제 그분이 인제 오늘 인제 그 분이 중간에 그 스님이 됐던가 봐요. 스님이 중이 되어서 인자 송광사에서 스님이 됐어. 그래가지고 송광사에 십육 국사가 났잖아요. 여섯 번째 국사가 원감이라는 호를 받아가지고 나라에서 원감. 원감국사라..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한국전쟁 때 산사람 친구가 살려준 소방대원 형님

한국전쟁 때 산사람 친구가 살려준 소방대원 형님 ▶ 한국전쟁 인공시절에는 날마다 동네에 모여 인민군 노래를 불렀다. 형님 세 분이 모두 경찰, 군인, 소방대원이라 주목을 받아 힘들었다. 소방대원 형님은 해창 곡식창고를 지키다가 산사람들에게 잡혔는데 모령 사는 산사람 친구가 도망가게 배려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다시는 전쟁은 안 일어나야 한다. 전부 모였거든 동네에. 오락 하먼 안 올수가 없어. 그래가지고 모여서 그 인민군 노래 잉 “야~ 뭐~ 양코배기” 인제 옛날 그런 다 잊어부렀는디. 인자 저녁마다 그놈 했거든.그라고 인제 각 부락 연락을 할 수가 없은께 연락병을 한 부락에, 연락을 이 부락 여기는 이 부락. 연락을 거그까지 조직을 했어. 그 놈들 유명 안하다고, 조직 그거 한 것은.그래갖고 하고 인..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여성바우인 사인바우에 맞서 세운 남근석

여성바우인 사인바우에 맞서 세운 남근석 ▶ 마을에서 남자들이 일찍 죽으니 여성바우인 사인바우에 맞서 마을 앞에 남근석을 세웠다. 거 뭐입니까. 거 남자 이[두 손을 둥그렇게 만들며] 세와 갖고, 여자들은 오래 사는데 남자들은 일찍 죽는다 해갖고 그걸 세왔던 적이 있어요. 남근석을 인자. 그런데 중간에 경지정리로 없어져 불고 또 대리로 한나 마을에서 세웠어요. 그랑께 그 사인바우가 여성바우라 해갖고. 그러면 뭐냐면 여자들은 오래 산디 어째 남자들은 일찍 죽냐, 이래갖고 그런 유래로 한 적이 있습니다. 자료번호 / 06_12_01_FOT_20161205_AOH_0002 제보자(구술자) / 안옥환(남, 84세, 건산 1구)

장흥읍 2017.09.14

[장흥읍] 마을로 불어오는 서풍을 막기 위해 심었던 150~200년 된 노송들

마을로 불어오는 서풍을 막기 위해 심었던 150~200년 된 노송들 ▶ 예전 마을 앞에는 불어오는 서풍을 막기 위해 150~200년 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서있어 경치가 좋았다. 하지만 도로를 확장하면서 모두 베어버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마을에는 또 서풍이 있어갖고 바람이 시어요. 요새는 집이 있지만 옛날에는 집이 없어갖고 그 앞에다가 소나무를 심어갖고, 한 지금부터 70년 전까지도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요. 요 앞의 마을에가 도로가로 해갖고. 그것은 전에부터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 소나무란 것이 한 보통 150년, 200년 되지 않엤냐. 그라고 전부 도롯가에가 있었어요. 그 빤듯한 놈, 쑤욱 꼬부라진 놈, 모도 자빠진 놈 그러코롬 해서 있었어. 상당히 경치가 좋았었는디 근래 와서는 기양 모두 비어불고 ..

장흥읍 2017.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