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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대덕읍

[대덕읍] 장석을 잠두마을에 세운 사연

장흥문화원 2017. 9. 18. 09:25

 

 

 

장석을 잠두마을에 세운 사연
▶ 해방 직후, 대덕 잠두마을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남성들이 특히 많이 죽어나갔는데, 어느 날 풍수 보는 이가 와서 잠두마을 건너편 가학마을에 있는 산이 비치기 때문이라며 액운을 방지하려면 마을을 지키는 장승을 세워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이 장승이 나무라 비 등에 취약해 늘 썩어나가는 바람에 나중에는 돌장이에게 의뢰해 장석으로 바꿔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 장석 터라는 것은 그 일제 해방 막 돼가지고 어떻게 전염병, 천연두 막 열병 이런 것이 아주 심했어요. 그래가지고 그 병으로 해서 사람이 많이 죽어, 시골에. 우리 부락에도 그래가지고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과부들이 많이 생개(생겨), 남자들이 마이 죽어. 그란께는 인자 부락에서 막 걱정을 하고 그랬는디 사람 죽으믄 누구 처낼 사람도 이런 정도였어요, 그때. 그랬는디 풍수가 와가지고 그 잠두마을에서 건너다 보믄 가학마을이 있는디 가학 뒤에가 이렇게 산이, 진목리 산이 삼각형으로 이렇게 내민 산이 있었어. 그 산이 비치면 저것이 홀애비 산이다 그것이여, 풍수 말이. 그래가지고 저 산이 비치니까 잠두가 홀아비가 많이, 과부가 생긴다, 그래가지고 저걸 방지할라면은 장승을 세워야 쓴다, 그래가지고 나무로 처음엔 세웠어요. 나무로 해가지고 깎어가지고 장승을 세웠는데 나중에 장승 그것이 비 맞으면 늘 썩어 뿔고 그러니까 그 뒤로 한 2~3년 있다가 청다리서, [왼쪽 뒤편을 가리키며] 저 청다리서 도구통도 만들고 막 각석을 깨는 돌쟁이가 있었어. 그 돌쟁이한테 맡겨 가지고 장석을 깎어서, 돌로 깎어가 만들었어요. 그래가지고 세운 것이 오늘날까지 그 장석으로 남어 있는 것이지, 장석. 그란디 그것을 목포대학교에서 어디다 등록을 시켰어요, 그것을. 무슨 문화원에다 등록이 돼 있을 거예요, 지금. 목포대학교서 와 가지고 그것을 그때 한 두서너 차례 댕기면서 거기에 대해서 많은 연구도 하고 그런 뭐가 있었어요.

 

 

 

 

 

 

 

 

자료번호 / 06_12_03_FOT_20160920_GSG_0005
제보자(구술자) / 김선관(남, 83세, 잠두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