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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대덕읍

[대덕읍] 해방 무렵, 옹암에 불어 닥친 태풍

장흥문화원 2017. 9. 18. 09:46

 

 

 

해방 무렵, 옹암에 불어 닥친 태풍
▶ 일본의 패색이 짙던 해방되기 열흘 전쯤 이곳 남도쪽으로 태풍이 불어 닥쳤다. 상황이 불리해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벼를 모조리 일본으로 빼 가기 위해 배에 실어놓고 있던 때였는데, 그 태풍에 벼가 다 물에 빠져 옹암 쪽으로 밀려오게 되었고,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옹암 사람들도 그 벼를 일본인들 몰래 건져와 먹으면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옹암에서 해방되기 한 열흘 놔두고 태풍이 불었어. 어마어마한 이 태풍이 불었어. 불었는디 그때 당시에 일본 사람들이 상황이 불리해가지고 우리 한국의 나락을 싹 일본으로 빼서 간(갈) 판이여. 인제 싹 일본으로 빼서 간 판인데 태풍이 하다(하도) 부니까 그 나락 실은 배가 요리 피신, 피난을 왔어, 이 바다로. 여긴 안 떠올라 놔서 바람이 잘 안 부는 데여. 그란데 잔뜩 바람이 씨게 부니까는 이 그 큰 배에서 이 나락을 싹 물에다 퍼 넴긴 거여. 물에다가 싹 퍼 넴기고, 퍼 넴겨 갖고 했는디 나락이 요것이 물에서 십리를 간다 이것이여, 안 가라앉이고. 안 가라앉이고 이렇게 떠서. 그래가지고 이 옹암 저 앞으로 해갖고 어마어마한 이 나락이 밀렸어, 그때 당시에. 그란데 그때 당시에 죽을 묵고 이 섬, 아닌 게 아니라 이 뭐 산천 풀잎도 없는 판인데 그놈이 밀려왔으니 어째? 그래갖고 그놈을 주서가지고 인자 싹 쪘지, 쪄. 그래갖고 올벼쌀, 올벼쌀을 만들어. 그래갖고 그놈을 해갖고 밥을 해묵고. 그란데 저 건너 삭금리 앞에라고 이 건너 삭금리. 그 앞에가 제일 많이 거(기)가 가라앉아버렸어. 그래갖고 여기서 옹암 사람들이 가서 갈구쟁이를 치(쳐) 가지고 이렇게 땡겨 갖고는 나락을 건진 거여. 그래갖고 참 나락을, 말도 못한 나락을 건졌어. 그래갖고 삭금리 집 앞으로 이렇게 해서 싸악 재 놨제. 그란데 나락을 못 갖고 가게 하니까, 일본 사람들이 그때만 해도 몽둥이 듣고(들고) 이 몽둥이 듣고 그때만 해도 몽둥이 듣고 막 못 갖고 가게 하고 그라는디 나락을 배에다가 떨치고는 거기다 한 가마니씩 붓어가지고 몰래 이렇게 갖고 오고 인자 그렇게 했어. 그랬는데, 그라고 있는디 해방이 됐어, 인자. 해방이 되었는데 그때 일본 사람들 참 서럽게 하고 두들겨 마이 맞고 서럽게 들어갔제, 들어가기를. 그랬는디 삭금리 사람들이 자기 집 앞에 가 나락이 있은께 자기들 거라는 거여. 그래가지고 우리 옹암 사람들이 참 말도 못하게 억센 사람들이라. 그래가지고 나락을, 이 나락을 누가 다 건졌냐? 옹암 사람들이 다 건졌지 않냐? 그래갖고 해갖고 가서 나락을 배로 실고 오고 그래 해갖고 배 한 척은 이 건너,에서 가라앉아가지고 뻘로 묻혀, 묻히고, 한 척은 요 너매가 바로 요 너매가 한 척은 밀려가지고 거그가 그때 바람이 얼매나 불었던가 그 큰 배가 거기서 가라앉히고 그랬어. 에, 그라니까 일본 사람들 그때 한참 군량미를 지금 말하면 막 일본으로 빼 간 판이여. 해방된, 해방, 얼마 안 돼서 해방이 돼버렸어, 그 바람 불어갖고. 그라고는. 그라니까 내가 생각하기 한 보름도 못 됐을 거 같어, 한 보름도. 그라고는 해방이 그때 됐어.

 

 

 

 

 

 

 

                                           옹암마을

 

 

 

 

 

 

 

 

 

자료번호 / 06_12_03_MPN_20160905_GSH_0002
제보자(구술자) / 김선호(남, 82세, 옹암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