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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대덕읍

[대덕읍] 달팡이재서 모신 잠두마을 당산제

장흥문화원 2017. 9. 18. 11:21

 

 

 

달팡이재서 모신 잠두마을 당산제
▶ 예전에 잠두마을에서는 ‘달팡이재’라 부르던 고개에서 당산제를 지내곤 했다. 그러다가 마을에 사당나무를 심어서 당산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300년 이상 된 그 나무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당사’라고 우산각처럼 지어서 당제를 이어가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외지인들이 많이들 들어오면서 당제를 안 지내게 되고, 그러면서 마을이 옛날과 다르게 점점 빈촌이 되어버렸다.

 

 

그 지형이 달팡이재 그래요.
- (달팡이재… 달팽이처럼 생긴….)
달팽이라고 그러는 모양이에요. 거기서 사투리로는 달팡이재, 달팡이재 그러거든요. 일제 때 일본사람들이 와서 신작로를 냈지마는 그때는 맨 걸어 다니는 게 재여 재. 재 넘어 댕기는 게 달팡이재, 세부개재, 솔치깨재, 그런 맨 밭 넘을 재. 전부 다 재가 얼마나 많은가 몰라. 그런 재거든. 그 달팡이재가 그리 넘어가지고 신월도 오고, 신리는 멀무덤(말무덤)재라고 하고. 그렇게 재로 살던 게 달팡이재인디 달팡이재 머리에게 짓당머리라고 지은 거라, 짓당머리. 그란데 우리 잠두리 당산제를 거기서 모셨다 이거여, 짓당머리. 짓당머리 그래요, 당산제를 거기서 모셨기 때문에. 그랬는디 옛날에 거기서 모시다가 잠두 마을에다 사당나무 심어다가 사당나무 밑에서 그 뒤로는 거기서 모셨제. 그런디 그게 귀목나무인디 그게 한 300년 이상 된 나무가 그냥 죽어서 내려앉아버렸어요. 썩어버렸어, 그래서 없어져버렸어. 나무가. 그것이 한 2~30년 되었을 거예요, 그거 죽어뿐 제가.
- (갑자기 왜 그렇게 됐어요?)
아니, 한 가지씩 늘 죽었는디, 우리 어려서만 해도 나무가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이 사당, 온 사방을 다 덮어요, 이렇게 컸어. 나무가 이렇게 가지가 쭉 뻗어 있는디 거기다 (줄을) 매놓고 그네도 타고, 그렇게 했는디 그 나무가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죽어서 내려앉더니 결국은 죽어버려요.

- (그게 팽나무였나요? 느티나무? 팽나무?)
그 나무가 귀목나무예요, 귀목나무. 거기다 모시다가 그 나무가 죽어뿐께 당사라고 조그마하게 지었거든요, 당사라고. 우산각 같이 지었어. 거기서 몇 년 지내다가, 또 신식 사람들이… 인자 옛날 사는 사람들이, 본토백이가 별로 없고, 막 사방에서 모여들고 간척지 모인 통에 사람이 많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어요. 그란데 그거 모실라면 경비도 많이 들고 그때는, 그랑께는 없애뿔자 그래가지고 당산제를 없애버렸어요. 그게 문화제인께 그대로 유지를 했어야 되는데….
- [그라믄 그걸 없애고는 뭐 탈은 없었소?]
그란께 없애고 탈이 있는지 없는지…. 부락이 하나 안 되제 뭣이. 무진 가난해지고. 옛날에는 우리 마을에서 그 저, 여기 저 대창에서 요리 도통으로 올라오는 가운데 질(길), 질이 있어, 그래가지고 그거 독다리라고 있었는데 여기 저 도통 오는 데. 그라믄 그 안에, 일제 때 내곡농장에서 이 농장을 막아놓고 저 가학 앞에는 봇물이 들어가고 도통 앞에는 방죽물 들어가고, 여기는 양아 앞에가 방죽이 있는디 그 방죽물 받으고, 높은 데는 전부 묵어서 전부 이렇게 농사도 못 짓고 있어. 그때는 비료도 없고 그란께 일제 때는, 그란디 거기는 물이, 깊은 데는 물이 좋아. 거기서 양아는 하나도 못 벌었어. 그렇게 이 잠두 사람들이 많이 농사를 지었어. 그랬는디 지금은 그렇게 빈촌이, 대덕에서는 빈촌이 돼버렸어, 제일로….

 

 

 

 

 

 

 

 

 

자료번호 / 06_12_03_MPN_20160920_GSG_0001
제보자(구술자) / 김선관(남, 83세, 잠두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