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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면

[용산면] 고사하면 또 심고 또 심고 누대에 걸쳐 두 그루 정자나무를 심어온 쌍정(雙亭)마을, 접정(接亭)

장흥문화원 2017. 9. 21. 11:00

 

 

 

고사하면 또 심고 또 심고 누대에 걸쳐 두 그루 정자나무를 심어온 쌍정(雙亭)마을, 접정(接亭)

▶ 저드리 들판에 두 그루 정자나무를 심어 아름드리가 되자 쌍정이라고 했다. 저드리 두 그루 정자나무가 죽자 지금 접정 자리에 다시 두 그루를 심었다. 이러한 일이 누대를 걸쳐 진행되었다.

 

 

접정마을은 나로 해서 13대조 이청강 선생이란 양반이 계셨어. 그 양반이 손자 시슬, 서이를 나셨는디. 한 분은 어산 상파, 한 분은 묵촌파, 그 한 분은 접정판디 싯짜치나. 그래서 어산서 어서서 하뤼 쉬다가 싯짜치를 행제 저더리 뒷까끔 너무로 해서 저더리로 해서 접정 부근으로 저금을 내셨어. 그래가지고 그 저드리 앞에다가 두 구루 정자를 세웠는디 그 정자가 아람맥이 서너, 인자 아람맥이[두 팔을 둥그렇고 넓게 펼치며] 여가 있었는디. 두 구루가 있다길래 이름을 쌍정이라 그랬어. 쌍이라는 [쌍]짜하고 정자 [정]짜. 쌍정(雙亭)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있는디. 그래서 그 후로 쌍정이라고 기초에 그렇게 하다가 차근차근 나오다가, 인자 대일 [접]자 접정(接亭)이라, 정자가 서로 맞대있다. 그래가지고 이 형성이 저더리, 여가 지금 시 쪽으로 나나졌어. 저더리랑 기본이 거리 저금을 내겠다가 가운데 원뚱. 그란디 시짜 그 할아버지 이름이 [엄]짜여 엄 짜. 할아버지 시짜 손자 이름이 엄 짠디.  이 지뚬으로 나나저가꼬 이름을 처음에 쌍정이라고 했는디. 저더리 앞에 쌍정이 고사해서 없어진께, 접정 원 마을에다가 그전에 요렇게 크은 또 정자 두 개를 심었어. 정자 두 개를 심었는디 그것도 또한 고사를 했어, 세월이 가기따문에. 그란디 13대니까 나로 13대니까 3대 2대 10대조께서 요리 터를 잡어겠제. 10대조가. 요새로 말하믄 300년 이상 되요. 그렇게 해나오다가 인자 접정 앞에 인자 두 번 채의 쌍정이 또 죽어가꼬. 그 자리다가 동네서 나 이장할 판에 유종인이란 사람이 한날 갖다 심고, 지금 마을에 있는 거 지금 현재 있는 놈. 그라고 인자 거기에 비해서 거그다 인자 한나를 심고 한나는 어디냐믄 우리 집 뒤에. 저놈하고 병립을 시켜가지고 인자 쌍정이라고 병립이 이루어진 거다 말이여.[양팔을 나란히 들며] 그렇게 해서 그 후로 이 저더리가 형성이 되고 접정이 형성이 되고. 그라다가 나로 해서 6대조께서 아양동 묵촌서 살다가 아양동 골창으로. 참 처사로서 이 참 초당이. 초당이란 우리 6대조께서 산중에서 아양동에서 사시다가 그냥반이 접정으로 이사를 와가지고. 지금 나로 해서 인자 5대조. 그라고 고조부님 고조부님 때에. 여가 전체적으로 우리 알기도 그래, 전체적으로 뻔덕지여. 우리 어려서보믄 요것도 우리가 지은 것이여, 우리집이서.[들판을 가리키며] 경지정리는 되았지만은. 그라고 여가 집이 한나 없어. 우리집 한나 하고 쩌그 저 머시기 도개집. 술 만든 도개집하고 지서하고 왜정말에 학교, 요거.[용산초등학교를 가리키며] 그라고는 거그는 묵전이라 해서 포로시 오다마 장사, 요만한 거 폰 그 한두 개 있고 지서 있고 없어. 싹 없어, 전부 뻔덕지였어. 그래가꼬는 우리 참 고조부님께서 산중에서 접정으로 이사와가지고 하뤼 쟁일랑 떼밭을 파. 묵고 살라니깐 떼밭을 파서 땅을 기경해서. 떼밭을 파서 그렇게 하고 있는디 어딴 과객이 가다가, 현재의 그 집터에다가 거그에다가 집을 짓고 사라고. 그래서 우리 참 고조부님께서 막을 조그막하니 쳤드라고 그래. 그라고 원 접정은 접정 오두막집이서 살다가 요리 이사를 왔어. 그래 여그서 살면서 이 개간을 하고 어차고 한디. 면사무소 뒤에 솔나무가. 여그서 질이 여렇게 면사무소로 소재지로 나가는 가운데 질을 놔두고 저쪽으로는 일부 밭이 있고, 전부 대밭이여 한쪽으로는. 큰 대밭이 있었어. 그라고 요쪽으로는 오른쪽으로는 밭이고. 그란디 왼쪽으로 지금 솔 심어진대는 우리 6대조께서 소나무를 거그다가 재배해서 심고. 질 여쪽에는 어산, 돌아간 고인 되았는디 병옥이 증조부께서 심었어. 그래가꼬는 나중에 인자 그 나무를 비어가면서 병옥이 집서 싸악 비어가고. 그라고 우리도 인자 비어간 께는, 거그가 공지고 그라니까는 거그가 있는 놈을 전부 우리집으로 비어왔는디. 중년에까지도 우리집이가 나무 도구통이 요마니나[두 팔을 넓게 둥그렇게 펼치며] 큰놈이 있었어, 나무 도구통이. 그래서 그놈을 비어올 띡에 여섯 준가 멫 주, 석 준가 넉 주를 냄개 났드라고 그래. 그걸 유언이여. 저놈을 말이여 냉개 났는디, 저것이 우리 고조부님께서 심은 거란 말이여. 그라고 또 표성이, 우리집 뒤에 이 팽나무도 우리 고조부님이 심어놓은 것이고.

 

 

 

 

 

 

 

                                                 접정마을 면사무소 소나무

 

 

 

 

 

 

 

 

                                                 접정마을 정자나무

 

 

 

 

 

 

 

 

 

 

 

자료번호 / 06_12_04_FOT_20160812_LYS_0001
제보자(구술자) / 이영숙(남, 85세, 접정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