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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면

[용산면] 유치 빨치산 토벌하러 갔다가 강진, 장흥에서 최초로 전사한 경찰 형님

장흥문화원 2017. 9. 21. 11:05

 

 

 

유치 빨치산 토벌하러 갔다가 강진, 장흥에서 최초로 전사한 경찰 형님
▶ 한국전쟁 전 해방공간에 아버지가 반란군들에게 피살을 당하자 형님은 경찰에 입문한다. 강진 옴천지서에서 근무하며 그 동네 제일 부잣집 딸과 결혼한다. 하지만 전쟁 중에 장모와 아내가 다시 반란군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복수한다고 유치 토벌 작전에 나갔다가 전사한다.

 

 

제가 그 6·25를 젂었던 이야기를, 우리 가정이야긴데 좀 말씀드리고 싶어서. 내가 그 지금 유가족이 된 이유가 저 6·25 전에는 이 반란군들이라고 산에 댕긴 사람들, 좌익들. 말하자면 지금으로 말하자면 공산당들이지. 그 사람들이 산에서 굴 파놓고 산 시대였거든요, 6·25 전이여 그때는. 그랬는디 인자 그 분들이 우리집 패망을 시키는 것이. 우리 아버지가 참 그때 당시 변호사 사무장을 하셨어. 왜정 때 변호사 사무장을 하셨는데 그 때게 이 구장이라고 있었어, 동네에. 지금은 이장이지만은 한 구에 구장. 그람 구장을 누가했냐 그라믄 저그 백부님이 구장을 하셨어. 백부님이 구장을 하셨는데 우리 아버지만 동생만 덜 야물어. 말하자면은 얼릉 알기 쉽게 말하자면. 그러니까 이 산에 그 반란군들이 그때 당시는 부자들 죽이고, 야문 사람들 죽이고 그런 시대였거든요. 그래가지고 우리 아버지를 피살 시켜부렀어. 사십 살 된 해에 피살을 시켜부렀어. 그 밤에 반란군들이 와가지고. 지역 반란군들이었죠 그때는. 지역 여그 이 지역 사람들이었어. 그래가지고 그 뒷날 다 잡혀가지고 죽었는데, 그 사람들은. 그래서 그때 당시 우리 형님이 지금 살어계시면은 팔십팔 무진 생인데, 에 팔십구 살인데 지금 살아계시믄 팔십구 살인디. 그때 당시 형님이 이 장흥버스, 말하자면 전남버스 조수를 했어. 조수를 하다가 아버지가 인자 피살되니까 경찰학교를 입문을 하셨어요. 그래 경찰학교 제 1기생인데 우리 형님이. 그래고 경찰을 투신을 해가지고 쭉 경찰생활을 하는데, 하다가 6·25를 만난 거이제. 거기서 경찰을 생활하면서 어디서 근무를 했냐 그라면 강진 옴천이라는 데서 근무를 했는데. 어떻게 지역사람들한테 인심을 얻어가지고, 스물세 살 묵었는디 그때 당시. 인심을 얻어가지고 지역유지들이 중매를 해서 결혼을 시켰어. 그라믄 옴천면에 제일 부잣집 박씨라는 집인디. 제일 부잣집이다가 인자 부잣집 딸하고 결혼을 중매를 해가꼬 결혼을 시켰어. 그래가꼬 결혼을 해가지고 사는데. 결혼해가지고 살던 해에 6·25를 만나노니까 이 냥반이 경찰했을 때 인자 피신을 간거야. 그 여그 사람들은 이자 장흥, 강진사람들은 완도로 전부 피신을 했거든요. 그래 완도로 피신을 하는데, 신리 앞에서 배를 타고 완도로 피신을 하는데. 우리 형님은 다 그때 경찰들이 배를 타는데, 형님은 배를 타기가 싫더란 이야기여. 그래가지고 똔바릿배 거 고기잡이배가 바다에가 섰으니까 거리 올라타 가지고. 인자 그 배는 인자 경찰들 실은 배는 떠나고 떠나다가 파산 되아가꼬. 거그서 파산 되아부렀어, 배가. 그랬다고 그래요. 그래가지고 여그 지역사람이 요동네 사람이 친군데 우리 형님 친군데. 그 사람은 갔다 죽어불고, 그때 당시 지서장이었는데. 가다가 죽어부니까 집이서는 죽은 날짜를 몰라부러, 제삿날짜를 몰라부러. 그래 형님이 갈쳐줘서 제사를 지내, 이웃동네 사람인데. 그래가지고 형님은 인자 그 배는 파산 되아버리고, 형님은 그 배에 똔바리배에 올라 타가지고 총을 공포총을 쏘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 와서 노를 저서 달라, 그래가지고 나왔어 육지로 나왔어. 육지로 나와 가지고 밤에 밤으로 해서 이 산에로 요 산 부용산 까지 왔었단 말이요. 그란 내가 학교를 오니까, 6·25 때 내가 육학년이었거든요. 학교를 오니까 빨갱이가 나타났다고 난리더라고, 저쪽에서 인자. 6·25 때라 인자. 빨갱이 잡으러 가야된다고 그래쌓더라고. 그것이 형님이었어. 인자 여그 운주 뒷산에가 숨어있던 것이 바로 형님, 우리 형님이었어. 그라 거그서 놀쳐가꼬 도망간 것이 강진 옴천 까지 간 거야. 산으로 산으로 해서 밤에 옴천 까지 간 거야. 옴천 처갓집이를 들어가니까, 그냥 그 동네 자위대들 말하자면 그때는 자위대들이 딱 집을 둘러싸고 있거든 집이가. 긍께 형 잡을라고. 그래 인자 거기서 잽힌거야, 형님이 6·25 때. 그래가꼬 잽해가지고 박산줄로 묶을락하니까 “느그들 사람 묶은 줄도 모르는 놈들이 잡어야.”그라고 형님이 갈쳐줘가지고 묶어가고 잽했제, 6·25 때. 잽해가지고 여가 고향이라 여그 인자 여그로 와부렀어, 용산으로 왔어. 용산지서에서 말하자면 징역을 산 거이제. 그래가지고 어머니가 밥 해다 주고, 여그 파출소에다가 밥 해다 주고 그렇게 인자 살다가. 인민재판이라고 있었어 6·25 때. “저 사람은 죽여야 된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니까 살려야 된다.“ 하는 인민재판을 해가꼬 인민재판에서 살았어. 여 인심을 얻어가지고 강진서도 인심을 얻고 그래가지고 살았어. 인민재판 6·25 때 살아났단 말이여. 그라고 인자 살었는데 다시 인자 대한민국이 복구가 돼잖아요. 그때 6·25 때 살았을 때 우리 형수가 그때 당시 임신해가지고 산고 달이었어. 산고 달이었는데 집이로 와가지고 저 앞날 옴천으로 가불고. 그때 팔월이니까 인자 감도 익어가꼬 그래가꼬. 그 인자 형수가 친정에 가분 뒤로 어머니하고 나하고 여기서 옴천 까지 걸어갔어. 걸어서 가니까 저녁에 그 형님 처갓집이를 들어가니까, 그 처제가 젊은 처제가 마악 못 오게 손을 치더라고. 그래 인자 뭐 어쩔 수 없이 드러간 거여. 그라닌까 인자 부락사람들이 자위대들이 죽일란다 이것이여. 그 어머니하고 나하고는 죽에불란다 그것이여. 그래샀더니 저녁이 되니까 누구 집에 가서 자라고 그러든마. 누구 집에 가서 자라 그란디 인자 잠이 올거여 인자. 그래서 인자 밤중에 어떤 사람이 후라시를 탁 비춰서 내 어깨를 탁 끄집어, 난 그때 열네 살 먹었으니까. 어깨를 딱 끄집으더니 “느그 형 어디갔냐.” 그것이여, 갈쳐달라. “느그 형이 어지께 와가꼬 도망갔다. 느그 형이 어디갔냐.” 그라고 갈쳐주라 그것이여. 진짜 어린 중심에 알면 갈쳐준디 모르니까 못 갈쳐준 거이제. 그라면서 그 시골 토방에다 놔두고 나를 인자 지둥나무에다가 세와 놓고는, 이 새끼, 칼 들른다하면서 안 갈쳐주면 죽인다, 막 엄포를 논거야. 그런디 우리 어머니는 울고 뒤에서 울고. “죽에도 자응 다 가서 자응 가서 죽에주시오.” 하고 있고. 그라더니 어뜬 놈이 내 어깨를 와서 칼로 찍어불드라고, 어린 나를 찍어불드라고. 그 대게 찍었으면 죽었제 나도. 인자 지금도 흉터가 있지만은. 그래가꼬 인자 어뜬 놈이, 그중에서는 말하자면은 인자 지휘자제 어른이제. “추접하니까 죽여도 쩌 자흥 가서 죽에부라고.” 가락 하더라고. 그 온디 아 옴천서 걸어온디, 배녕을 오니까는 깃발이 날러 태극기가 날른거야. 태극기가 나린거야. 그란께 인자 그때 수복 되가꼬 내려온 판이지. 그래가꼬 와서 인자 저는 살았는데, 저하고 어머니하고는 집으로 와서 살었는데. 형님은 그때 도망가가꼬 복구가 되니까 다시 경찰 입문을 해분거야. 6·25를 지끼고 인자 대한민국이 복구가 되니까 다시 경찰을 입문을 해분거야. 그래가지고 입문하믄, 그때 당시는 인자 머 반란군들 공산당들이 산중에 막 집결해서 산에서 살었잖아. 그래 유치 어디 산중에가 토벌작전이 있다고, 인자 반란군들 거 공산당들 있다고 그래가꼬 저 옴천 지소로 명령이 내려오니까는. 형님이 그때 당시 차석이었는데. 인자 의경들, 각 그때는 지서에가 의경들이 몇 십 명씩 있었거든요, 여그 용산도 많이 있었지만은. 의경들 데꼬 인자 토벌작전을 나간거야. 나갔는디, 그 나가기 전에 6·25 때 형님 장모하고 형님 마누래하고 반란군들이 데려다 죽여부렀어. 그 6·25 때 죽여부니까는 인자 분이 나가꼬 형님이 다시 입문을 해분거여, 경찰에. 그 토벌작전을 가작하니까 부하들이 가서 인자 발견을 해가꼬. 어뜬 놈이 들어갈라 할꺼시여, 그 안에가 공산당들이 다 있는디. 안 죽을랑께 안 들어가지. 그랑께 인자 형님이 “나는 장모, 마누래 보복 할라니까, 내가 들어간다.” 하고 제일 먼저 선두에 들어갔다가, 딱 여그 총 한방 맞었드만. 6·25 직전 인자 장흥, 강진에서 첫 전사여. 첫 전사, 6·25 직후. 그래가지고 여그 학교 와서 인자 면민장을 해가꼬 거창하니 치상을 쳤는데…. 형님 장모하고 마누래하고 한 구더기에다 잡아여붓써. 그래가지고 인자 우리 작은 형님이 몰르니까, 거그서 부잣집이니까 그 묘 갈쳐주라고, 부락사람들 날마당 소 잡아 믹이고 어차고 해가꼬. 거그서 인자 묘 갈쳐줘서 이장 해다가 여그다가 모시고 있제 지금, 그 형수까지. 지금 우리 형님하고 형수하고 지금 한 묫이여, 합뱀하고 있제 지금.

 

 

 

 

 

 

 

 


자료번호 / 06_12_04_MPN_20160812_KDK_0001
제보자(구술자) / 김동국(남, 80세, 접정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