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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면

[용산면] 대학생 모자만 보아도 순경인 줄 알고 놀라 숨었던 한국전쟁

장흥문화원 2017. 9. 21. 11:17

 

 

 

대학생 모자만 보아도 순경인 줄 알고 놀라 숨었던 한국전쟁
▶ 한국전쟁 때는 무법천지였다. 지서 주임에게 총살권이 있어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 마을 인심이 좋아 몇날 며칠이고 경찰이 머물면 돼지며 무엇이며 잡아 먹였다. 심지어 마을에서는 멀리 대학생 모자만 보여도 경찰인줄 알고 사람들이 숨었다.

 

 

그때 선거가 6·25 든 핸가 그 앞 핸가. 앞 해 그 저 오 뭐 뭔 데이 노동날. 그 그런 거 있그던. 메이데이 그날 습격당했어, 공비들한테. 그 산 속에서 우장 쓰고 나와서 지나가는 차 습격하고. 6·25 인자 직후로 평정이 안 되얐을 때 그때 지서 주임에까지 총살권이 있었거든. 그때 우리가 열두 살, 어려서 들어봤어. 그란디 그때는 교통이 안 좋아. 추럭에서 추럭에다 관산서 인자 그 범인을 실고 장흥으로 간디, 뭐 탈영하기가 거시기가 감당하기가 어려와. 그런께 그냥 그 차에서 관산 주임이 내려갖고 그 또랑으로 조르라니 끄꼬 가서. 요리 여 이 마을 앞에, 여그서 보믄 잘 보인디 산 속에. 거그다가 뭐 여덜인가 아홉인가 쏴 죽여놨어. 그란디 총소리만 났지 그때는 무서와서 어디를 못 간디. 한 메칠, 한참 겨울이여 메칠 있다가 어떤 사람이 인자 용변을 보러 그리 지내가다가. 그 고개를 넘어 댕겨 그때는 보행 시절이라. 큰길인디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걸 보고 깜짝 놀래가지고 마을에서 나서서 묻어주고 그랬는디. 그 뒤로 임자가 후손들이 와서 서서히 파갔어. 냇가창 가에 그 자갈 있는 거깄다가. 와 그런 세상이었어요. 그랑께 뭐 재판을 통하도 안하고 그 뭐 쌩쌩한 사람도 있제. 오해 받아서 모함해서 간 사람도 있고. 그것이 우리가 알기로는 오히려 공비들한테 죽는 숫자보다 훨씬 많다고. 뭐 이 동네는 인심이 좋아갖고요. 경찰이 인자 거 수복해 가지고 왔는디 정부에서 그 경찰 먹여 살릴 대책이 없어. 그랑께 인심 좋은 요리 와갖고 우리 혹사병 들었구만. 그 사람들 멘 날 메칠 멕여 살리고 경찰. 그라고 또 무서와서 그냥 귀한 돼지 잡아 멕이고 뭣 잡아 멕이고. 그라믄 이 잡부금이제.[웃음] 잡부금이라고 문서가 수두룩해. 멫 년 전까지 우리 집에 그 문서가 있었어. 내가 그란디 뭐 방 수리 한다고 옮긴 뒤로 없어졌는디, 어마어마한. 그렁께 그걸 인자 할당을 하제. 부자는 더 많이 할당하고 뭐하고 그란디. 그 잡부금 문서가 있는디 1년이믄 한 댓 페이지 되더라고. 그랑께 마을 비용을 연하(宴賀-축하 잔치를 베풂)라 하드만. 뭐 특별연하, 보통연하 요런 식으로 해갖고.(웃음) 그렁께 이 마을가 인심이 좋은 께 왔다, 딴 디 가트먼 이렇게 저 대접을 못해주고 그런디.여기도 뭐 6·25 전후로 보믄 뭐여 그 보도연맹, 그 사건에 모도 돌아가신 양반 있고. 또 가갖고 소년들 소년형무소로 갔거든, 나이가 어린께. 그 법은 한계가 났던 모양이여. 소년형무소 뭐 인천소년형무소, 그런 디를 갔더라고. 그 다른 범죄는 뭐 재판 과정이고 뭐이고 그런 거 구분 없었잖어. 지서 주임이 쏴블믄 끝나분 거여. 공비 아닌 사람도 기락 하믄 된 것이고. 그래 지금도 살어 있는 어른들이나 우리는 어려서 인자, 우리가 집안 나이 열한 살에 6·25를 당했거든. 사람이 죽기는 6·25 앞에 많이 죽었어. 앞에 뭐 소위 그 산사람들. 그라고 그때 대학생들이 모자가 요렇게[두 손으로 머리를 둥그렇게 감싸며] 생겼거든. 근사하게 생겼어. 어떻게 보믄 멀리서 순경 모자하고 비슷해. 그랑께 대학생만 와도 순사 온다, 그라고 사람들이 훼엑. 죄가 없어도 그렇게.[웃음] 그런 세상을 살았어요. 아조 고생들 많이 하고.

 

 

 

 

 

 

 

 


자료번호 / 06_12_04_MPN_20161128_KYK_0001
제보자(구술자) / 김용길(남, 77세, 모산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