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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장동면

[장동면] 자손이 번성하고 부유했던 우봉마을

장흥문화원 2017. 10. 18. 15:33

 

 

 

자손이 번성하고 부유했던 우봉마을
▶ 우봉마을 설촌 설화로,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길에서 잠이 들었는데 어미돼지가 우봉 아래 새끼를 낳아 키우는 꿈을 꾸고 그곳에 집을 지었다. 처음엔 가난했는데 손이 번창하고 부가 축척되어 우봉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어르신들한테 전해들은 그런 이야기거든요. 그전에 우리 마을의 안창주씨라고 저희보다 훨씬 더 어르신이셨는데 지금은 진작 돌아가시고 안계십니다만. 그분이 식견이 높으시고 그래서 제가 그 분을 가까이 많이 모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저를 많이 사랑해주시고 또 좋은 말씀도 해 주시고 그래서 거기서 그 양반한테 듣는 이야긴디. 우리 마을이 약 오백년 전에, 거 어느 분이었던가는 모르겄습니다만은, 저쪽에 가믄 높은 봉우리가 하나 있어요. 매봉이라고 매가 날아와서 거기서 쉬어서 또 사냥을 하고 했던 봉이라고 높은 봉우리가 하나 있는디 그 봉우리 밑에다가 제일 처음에 어떤 분이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이 살고 있었는데…. 그 뒤에 여기 들어오자면 배 밭 있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은 밭동이라고 하고 지금은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안동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두 동네가 나눠져가지고 있는데요. 그때에는 우봉이 아니고 적은 봉우리 밑에서 몇 집이 살고 있으니까 소봉이라고 했답니다. 적을 [소]자 봉우리 [봉]자 소봉이라는 마을이었었는디 그때 사신 분들이 주로 변씨들 꼭지 [변]자라고 변씨들이 와서 사시고 또 장씨가 사셨다고 합니다. 저쪽 마을에서. 여기는 마을이 동네가 되기 전에. 그리고 변씨, 장씨, 백씨 또 마씨 이런 분들이 사셨다고 합니다. 몇 집이나 살았든가는 몰라도. 그래서 우리 마을에 임야를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성씨가, 여그 현재는 우리 마을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만은, 변씨들, 산이 수십 정입니다. 저 안 꼴창으로 해서 이 꼴청 꼴자기를 차지하고 있는 그분들이 산이 제일 많아요. 변씨들 산이 그랬었는디, 그분들이 한 분도 여기서 거주를 안 하고 계십니다만은, 그 이후로 죽산 안씨들이 이듬해 보성군 보성읍 대하리라고 하는 마을에 그 강산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는디 거기에서 거주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갖고 거주를 하시다가 이 산을 넘어와서 우리 마을 앞에 있는 산의 들에서 논농사를 지으시겠다고 그래요. 논농사를 쭉 짓고 계셨는디, 어느 해에는 가뭄이 몹시 들어가지고 논에 물을 대주고. 그때는 물을 인자 수리 시설이 안되어갖고 있으니까 또 이렇게 딴 논으로 물이 들어가고 있으믄 내 논으로 물을 댈라고 뺏어가는 수가 있어요. 모르게. 그러니까 그 물을 대놓고 지키다가 잠이 들었어. 길에서 잠이 들어서 잠을 자는데, 여기에는 집이 하나도 없이 산만 이렇게 죽 내려와서 있었는디, 저 우에서 우에 어느 지점에가 돼지새끼가 새끼를 나아가지고 새끼 애미가 거서 우물우물하고 있는 꿈을 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꿈을 꾸고 나서 ‘야 내가 여기다가 집을 짓고 살믄 좋겄구나’ 그래가지고 그분이 여기다가 땅집을 지어가지고, 적게 처음에 째깐하게 집을 짓고 사신 것이 손세가 번창이 되고 부가 축적이 되어서 잘살게 되었다고. 그렇게 되았답니다. 그래서 동네가 그때부터서 안동이라는 마을은 마을이 되았어요. 그랬는디 이 마을 형국이 와우형이라 했답니다. 누울 [와]자 소 [우]자 소가 눕는 형국이라 그것이여. 그래서 그때부터서 소봉이란 마을이 소봉머리라고 했는디 그때부터서 오봉이라고 적을 [소]자 멧두리 [봉]자라고 했는디 그때서부터 우봉이라고 마을이름이 인자 변경이 됐습니다. 처음엔 마을이 아조 적어서 한 10호 정도 쩌쪽에만 되었었는디 이 마을이 형성이 되고는 큰 마을이 되었어요. 그래서 한 때는 그 뒤로 쭉 혼자 백여 년 세월이 오래 가니까 손실도 번창하고 부도 축적이 되고 그래서 잘사는 나라가 되고. 안씨들이 그 당시에는 자자일촌을 하고 지내셨다고 합니다. 쩌쪽에 박동이라고 하는 마을에는 제일 처음에 변씨들, 장씨들, 백씨들, 마씨들이 살았는디 그 사람들은 그 뒤로 어느 때쯤 떠난지 모르나 다 떠나고 한 분도 그분들은 안계십니다. 우리 마을이 그때부터 형성이 되았는디 근자에 이르러서 이렇게 마을마다 마찬가진디 우리 마을이 굉장히 축소가 되아서 10여호 남짓 되는 마을이 되아부렀습니다. 그렇게 되는 적은 마을이 되아부렀습니다.

 

 

 

 

 

 

 

 

                                                   우봉마을

 

 

 

 

 

 

 


자료번호 / 06_12_06_FOT_20161207_SJS_0001
제보자(구술자) / 심재승(남, 79세, 우봉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