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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유치면

[유치면] 아홉 마리 용을 내몰고 눈병을 퍼뜨려 지은 보림사

장흥문화원 2017. 10. 24. 09:26

 

 

 

아홉 마리 용을 내몰고 눈병을 퍼뜨려 지은 보림사
▶ 보림사 창건설화의 변형으로, 보림사를 창건한 보조선사가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와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에서 공부를 한 후 신라로 들어와 절터를 찾다가 장흥의 가지산에서 보림사 터를 발견했는데 하필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는 큰 소였다. 용을 내쫓고 그 자리에 절을 짓기 위해 선사가 오랫동안 공을 들이자 용 일곱 마리는 떠났는데 청룡과 백룡 두 마리가 뒤 늦게 까지 소를 떠나지 않았다. 불공을 계속하자 청룡과 백룡도 결국 소에서 나왔는데 용문에서 둘이 싸움이 나 백룡은 그 곳 소에 떨어져 죽고 청룡은 재를 넘어가다 바위에 부딪혀 상처를 입고 장평면 한 마을에 떨어져 죽었다. 그래서 백룡이 떨어진 소를 용소라 하고 청룡이 다쳐 피 흘린 재를 피재라 한다. 그리고 청룡이 떨어져 죽은 마을을 청룡마을이라고 한다. 그렇게 용이 떠나자 보조선사는 다시 소를 매우기 위해 비책을 세웠다. 먼저 사방에 눈병을 퍼뜨린 후 소에 숯과 자갈을 가져다 부으면 눈병이 낫는다고 설파했다. 그러자 눈병에 걸린 사람들이 숯과 자갈을 가져다 소에 붓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가 메워지고 그 위에 보림사가 세워졌다.

 

 

봉덕은 동산마을이 있고 구석마을이 있는데, 동산마을은 장흥읍에서 김해 김씨가 처음에 정착을 해서 거기서 생활하게 됐는데, 거기에 옛날 사기를 구웠어요. 또 당시 흔적이 있는데 땅을 파면 기와가 나오고 사기가 나와요. 그러면은 그때가 어느 때냐면, 보림사 절이 현재 1800년이 더 되었거든요. 그 절이 생기기 전에 마을이 구성되었다 추측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1800년이 넘었다고 대충 알고 있어요. 구석마을은 강진 윤씨들이 와서 정착을 했는데, 담배 재배를 하기 위해서 거그 와서 정착을 했어요. 근디 동산마을 보단 몇 백 년 늦어요. 동산마을이 훨씬 먼저 생겼어요. 신라 때 보림사 절을 지었는데, 인도에서 공부하신 분이 계세요. 보조선사라고. 거기서 불경을 공부하니까 “더 이상 당신은 도통해 부렀소, 불경에 대해서는. 그러니 가씨요”한 거예요. 그분이 다시 중국에 가는 거예요. 중국에 가니까 가지산 보림사가 있어요. 거그 가서 불교 공부를 또 하는데 거기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은 더 이상 불교 공부를 할 필요가 없소. 가씨요”한 거예요. 그때가 신라시대에요. 그래서 중국에 있는 가지산 보림사하고 인도에 있는 가지산 보림사하고 쌍둥이여. 건물이 똑 같고 터가 똑 같어. 한자도 똑 같아요. 산 이름도 똑 같고. 그래서 신라로 나와서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그런 산을 찾는 거예요. 한번 다녀가고는 못 찾았어요. 가지산을. 두 번짜 백두산에서 한라산을 쭉 가다가 장흥을 거쳐 가는 거예요. 장흥에서 가지산을 찾은 거예요. 산줄기 형이 똑 같아요. 인도나 중국과. 그런데 그 밑을 보니 큰 쏘예요. 매립을 하면 중국이나 인도와 똑 같거든. 그래서 거기 가지산에다 움막을 지어놓고 몇 년 간 불공을 드렸어요. 근디 그 쏘에가 용이 아홉 마리가 살았어요. 몇 년 간 불공을 드리니까 일곱 마리가 나갔어요. 근디 마지막 두 마리가 안 나가. 청룡과 백룡이. 그래서 계속 불공을 드리니까 이제 두 마리가 나가드래요. 근디 용문이란 디가 있어요. 보림사 조금 내려가면. 거기서 청룡하고 백룡하고 싸움이 벌어져요. 그래 가지고 백룡이 졌어요. 백룡이 져가지고 떨어져 가지고 그래서 거그를 ‘용쏘’라고 했어요. 용쏘란 말이 거그서 나왔어요. 그라면 청룡은 거그서 이기고 어디로 가냐 하면, 피제를 넘어가는 거예요. 피제를 가다가 바위에 부딪혀서 피를 흘려서 피제란 말이 거그서 나오더라구요. 그 다음에 거그를 거쳐 장평 청룡마을에 떨어져 가 죽었어요. 그래서 장평 청룡마을이 구성되었더라구요.

- (백룡과 청룡이 왜 싸웠어요?)
가다가 싸운 거지요. 불교 서적을 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요. 인자 스님이 용을 다 쫓아냈으니까 매립을 해야 쓸 것 아닙니까. 호남일대로 공양하러 다니면서 눈에 피를 뿌려부러요. 눈병. 그래놓고 또 공양을 다니면서 “가지산 밑에 큰 쏘가 하나 있는데, 거그 가사 숯 한포하고 자갈 한포씩만 부서 보시오. 그러면 당신 눈은 깨끗해 질거요”했어요. 그러니까 불교 시적을 보면 땡땡이 중이라는 말이 거그서 나왔어요. 땡땡이 중이 미친소리를 한다 이거예요. 인정을 안 해줘. 그래도 스님이 다니면서 계속 얘기하니까 화순선가 처음에 숯 한포하고 자갈 한포를 짊어지고 와서 거그다 부었어요. 부으니까 눈이 깨끗해져 부렀어. 그러니까 인자 (사람들이) “자네 어떻게 해서 눈이 그렇게 깨끗해 졌는가?”하니 (화순 사람이) “땡땡이 중의 말을 듣고 여차로 한번 부어 봤더니 내 눈이 이렇게 깨끗해져 부렸네”했어요. 이거이 호남일대에 홍보가 된 거예요. 그래갖고 호남사람들이 거의 숯 한포, 자갈 한포를 부었어요. 그래서 그거이 매립이 된 거예요. 매립되 가지고 절을 짓는데 한 사오년 걸렸다고 그래요. 동양 3보림 그래서 나는 절이 규모가 아주 웅장해서 그런지 알았어요. 근디 인도나 중국에 다 가봤어요. 대차 세쌍둥이여. 똑같애. 그렇게 웅장한 것은 아니여. 책자를 보니까 보림사 절에 약 3000명 정도 있었는데, 1000명이 해남 대흥사로 가고 2000명을 여기서 수용을 했는데, 여그서 공부하신 분들이 거의 모두 합격을 많이 했어요. 그것을 어떻게 증명을 하냐, 6·25 때 절이 전소되었잖아요. 재건할 때 포크레인으로 파니 숯이 엄청나게 나왔어요. 그라면 ‘옛날 얘기가 틀림없는 얘기구나’하고 우리가 인정해 줬어요. 또 물이 기가 막히게 좋았어요. 보림사 한 가운데에서 물이 솟아 나오잖아요. 숯이 다 걸러 주니까 그런 것 아니냐. 그러니까 보림사 절이 한 1800년 됐는데, 그 전에 구석마을하고 동산마을이 형성됐지 않느냐. 기왓장도 절에서 필요하니까 마을에 기와공장이 거그가 있지 않았느냐 생각하지.
- (절을 지은 이후 보조선사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하는 이야기는 없을까요?)
그 뒤로는 잘 몰라요.

 

 

 

 

 

                                                   보림사

 

 

 

 

 

 


자료번호 / 06_12_08_FOT_20161208_KSG_0001
제보자(구술자) / 강신근(남, 82세, 봉덕 1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