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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면

[유치면] 호랑이 도깨비보다 무서운 일본군

장흥문화원 2017. 10. 25. 09:22

 

 

 

호랑이 도깨비보다 무서운 일본군
▶ 일제강점기에 구술자의 친정아버지가 영암에서 식량을 구했는데, 일본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밤중에 산을 넘어 집으로 돌아오다 도깨비에게 홀려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런데 호랑이가 앞에 나타나서 겁에 질려 도망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호랑이가 눈에 불을 켜고 아버지를 집까지 인도했다.

 

 

너무너무 참 혹독한 일을 겪으셨어. 우리 친정아버님이. 일본사람들이 곡식을 식량을 빼앗아가잖아요. 그랬는데 늘 뺏겨불고 먹을 것이 없어서. 우리 아버님이 자손을 7남매를 두셨는디 홍역에 4남매를 잃어불고 서이만 길르셨더라요. 당신 속으로 귀하시제. 내 귀한 자식들 이렇게 배를 골리고 일본놈들 때문에 내가 열심히 일을 하믄 배불리 먹여 살릴 수 있는디 굶게 되신다고 한탄을 하시고 영암 모산리가 고모 몇찌 누님이 사셨는디 그 냥반은 잘 살았는갑디다. 일본놈이 늘 창질해서 뺏어가불고 그란께 영암 모산리로 식량을 구하러 가셨던가 봐요. 나락 한가마니 얻어갖고, 옛날 공판할 때 이렇게 묶고 이렇게 묶었잖아요. 저녁밥 먹고 너무 일찍 나오믄 안 되겄어서 아홉시 반경에나 출발해서 나오셨던가봐. 고모님이 “낮에 가제 어째 그러냐, 어째 갈라고 그러냐” 그런 것을. 동생이니까. 낮엔 올수 없응께, 빼앗긴께 밤길을 찾아서 오신디 조금 동네 밖에를 나온께 도깨비불이 여가 번뜩 저가 뻔뜩 막 그러더라 안하요. 그러다가 조금 있다가 털털털털 털고 번개같이 지나가서 보믄 호랑이더라요. 머리끝이 속곳하고 그래갖고 인자 섰다 안하요. 조금 있다 걸어가면 호랑이가 머커가고 있다고. 아버님이 당도하믄 옛날 보리짝 턴 소리를 하면서 앞으로 가고가고 했다 안하요. 도깨비불은 사방 데서 펀득펀득하고 모산리를 넘어가믄 재가 있다 해요. 너무 크도 안하고 작도 안하고 중간쯤인 재가 있는디 그 재를 넘어가는디 딱 넘어서 꼭대기에 가서 나락가마를 지고 깔끄막진 데를 올라가서 보니까 아니더라요. 당신이 넘어온 길이 아니더라요. ‘아 이거 아니네’하며 그놈을 짊어지고 도로 내려오셔서 5리나 된 길을 다시 내려와서 다시 옳은 길을 찾아서 온다고 온디, 두 번째 간께 또 아니더라요. ‘아 내가 도깨비한테 홀렸다’ 그런 느낌이 들었더라요. 메를 감고 땀을 정신을 차리고 또 내려와갖고 세수도 좀 하고 개울에 가서 담배도 한대 피고 그라고 정신을 차리고 어째 간게는 잘못들었더라요. 아까 그 길이. 세 번차에 옳은 길을 찾아서 넘어 갔는디 이놈의 호랑이가 밤새도록 따라 오더라요. 또 저만치 탁탁탁탁 털고 기다리고 몸살대살을 하고 아조 무겁기는 하고 밤중이나 넘었것는디 어디 재를 넘어갖고 어디 들판길을 가더라요. 훌떡 건너뛰는디 우리집에 오실거인디, 호랑이가 이만이나 해갖고 거가 엎져갖고 있더라요. 그래서 ‘나는 이제 완전히 죽는다’ 싶어갖고 얼마나 마음이 오만 마음이 교차가 되고 ‘나를 해칠라고 엎졌다’ 그러고 물러서믄 못 지나간다요. 옛날에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물러설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고 너 죽고 나죽고 싸워나 보자하고 나락가마니 짊어지믄 작대기가 있어요. 눈을 찔끔 감고 콱 찔렀더라요. 찔렀드만은 이거 호랑이가 아니고 바윗돌이드라요. 깡깡한. 이라고 다시 달빛은 훤한디 다시 이라고 보니까 왜 호랑이털로 보였을까 찬찬히 보니까 갈쿠나무를 사람들이 해갖고 가다가 낼쳐서 바윗돌 위를 덮었더라요. 갈쿠나무가 널짝널짝하니 호랑이털로 보였어요. 숨을 쉬고 지게를 쉬고 담배를 피고 그라고 얼마나 또 걸어서 오신디 호랑이가 또 불을 쓰고 털털털털 보내다주고 보내다주고. 어디 동네가 쩌가 있는디 하도 죽것어서 인자 이라고 보니까 옛날에는 노름하믄서 주막집에가 불을 오래도록 밤중 넘도록 켜 놓은 집은 노름한데요. 주막집에가 불이 켜졌더라요. 그래서 ‘그냥 사람들하고 말도 좀 하고 물도 한잔 얻어도 먹고 그라고 정신 좀 차려서 가야쓰겄다’ 그라고는 갈라고 생각을 한께 노름꾼들이 맘씨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노름을 하지요. 그란께 그놈을 까딱하단 뺏길거 같드라요. 또 예상에. 그래서 주막집 밖에 지게에다 받쳐놓고는 “주인장” 그러고 들어간께는 대체나 노름을 하더라요. 문을 툭 열더니 “이 밤중에 어인 양반이시오?” 그라드라요. 주모가. 해서 평상에가 주저앉음스로 “영암 매씨가 못 가게 못 가게 한 것을 너무 죽갓어서 물 한잔 마시고 숨 좀 쉬고 갈라고 내가 여기를 들어왔소” 그란께, 뽈깡 서서 주모가 나오더니 팔을 끌고 안으로 가더라요. 안으로 들어간께 옴박지에다가 막걸리를 함박 놔두고 퉁대알로 한나를 떠줌시로 “잡수쇼, 잡수쇼” 막 그래싸트라요. 그래서 인자 “와따, 감사합니다” 그라고 그놈 마시고 인자 돌아서 숨 좀 쉬고 오신디 아니 그라자 참 아니 그것은 그 다음이고. 막 온디 산에가 산속에가 불이 빤닥빤닥하드라요. 옛날에는 모르게 거 묘를 넘의 산에다 썼다고 하드라요. ‘틀림없이 이쪽은 모르게 뫼한 집이다’ 생각하고 그래서 ‘거기서 술 한 잔 얻어먹고 말 좀 하고 숨 좀 쉬어갖고 가야쓰겄다’하고 지게를 딱 받쳐서 놔두고 호랑이굴인가 또 빤닥빤닥 있드라요. 돌아서서 갈라한께는 그때 당시 제가 낳았어요. ‘이레가 있는디 묘쓴데 가믄 해롭지 않느냐’하는 생각이 들어서 서너발 가시다가 도로 돌아서 이렇게 본께 묘 쓴 데가 아니고 호랑이굴 이어갖고 막 털고 막 요리 오더라요. ‘큰일날뻔 났다’ 그랬더라요. 오다가 주막에를 들어가서 그렇게 인자 하고 그 숨을 쉬고 나와 갖고 한 대리, 유치 영암 한계선 한 대리 저자거리 가까이 온께는 먼동이 쪼까 트드라 안하요. 그래서 인자 ‘와따, 살았다. 살기는 살았다’며 걸어서 오신디, 복숭매기재라고 있어요. 반월 너머서 오는 재가. 또 그 재를 넘어서 오신디 완전히 날이 새드라하요. 집에를 들어온디 나락가마니를 지고 온디 어머니가 옛날 보리쌀에 독을 골라내고 있는디 아버님이 나락 한가마니를 지고 들어오신디 눈이 들어가고 없더라요. 어떻게 고생을 하셨는가. 나락을 디딜방아로 어머니가 찍으셔서 장항아리에 넣어놓고 다찧으믄 왕겨껍질을 한나 담아놓고 일제 놈들이 뺏어간께 덮어놓고 있는디, 한번은 마실하고 온께는 뚜껑이 어머님이 반듯이 해놨는디 배틀찌 되있다라요. 그래서는 이라고 떠들어보니까는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대성 고봉한되도 아니고 깨끼 한 대작이 구러졌드라요. 이것이 누구 소작이냐 거시기 큰어머님 큰아버님이 옛날에 일찍 돌아가셔서 큰집조카를 4남매를 키워서 여웠어요. 한디 막둥이 오빠가 병치레를 하고 겁나 어머니를 고생을 시켰어요. 옛날 배피가 나믄 피똥 싸는거 하믄 얼마나 힘들것어요. 맨날 갈아입히고 무명 바지 저고리에다가 “잠잘 때는 요놈 입고 놀 때는 요놈 입고 해라”해도 소용이 없고. 그라고 힘들게 키운디. 그 오빠가 사랑방에 놀러갔든가 어른들이 나락가져 왔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던가 쌀 있으믄 좀 갖고 온나해서. 그 사람들은 잘사나 못사나 소용이 없지만은 오빠가 퍼갖고 갔던가봐요. 사랑방으로. 어머니가 오빠 소작이다고 손목을 꽉 잡고 정재문 뒤를 돌아가서 “저기 저 쌀 누가 갖고 오라하디야? 갈쳐줘도 암말도 안할꺼인게 갈쳐줘”하며 사정을 한께 사랑방에서 갖고 오라고 한께 갖고 갔대요. 어떻게 갖고 갔냐 한께 아버지 주무농부들 흰바지 가랑이 째매갖고 퍼서 담어 갖고 갔다고 하더라고요. “몇이 밥 해묵었냐?”하니 “누가 있어서 못해먹고 놔뒀어요”해요. “그러믄 찾아갖고 와 잉. 작은아버지가 얼마나 니기들 먹일라고 죽다살다시피하고 여까지 짊어지고 온 쌀인디 그러믄 쓰겄냐” 했더니 그 다음날 갖고 왔더라요. 그렇게 고생을 하고 우리 아버지가 저를 먹여서 키웠는디, 제가 어떤 시련이 있어서 때로는 죽어불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힘들게 키웠는디 그래서 쓰겄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옛날에는 나락을 홀튼디 녹을 일곱씩 야닯씩 홀튼디 아침밥 해주고 샛것 해주고 낮밥 해주고 오후 샛것 해주고 저녁밥 먹어요. 저녁밥을 물고 일꾼들이 놀아 된께. 놀믄 아버지가 늘 하시더라고요. 서너 번 늘 들어보고 그란디 그렇게 소중하게 곡식을 얻어다 나를 살렸는디 삶에 도움이 되더라구요. 내가 ‘하찮은 일에 이런 마음을 가지면 되겄냐’ 생각이 들더라고요, 너무나 우리 아버님 겪으신 일이 너무나 말이 그렇지 호라이 보기만 해도 호랑이 사람을 해친디 뒤로 자빠져서 꼼짝도 못한디 밤새도록 호랑이랑 싸우고 도깨비한테 홀려서 그 재를 나락가마니를 지고 세 번을 올라갈 때 어짜시겄소. 날이 새자마자 들어온디 세상에 그런 일을 겪으고. 일본놈 때문에.
- (아버님께서는 그 후에도 건강하셨어요?)
예. 농사짓다가 살으시다가 돌아가셨지요. 그란께 지금도 우리 아버지라하믄 너무너무 짠하고 내가 넉넉하도 못하고 시골살림에 돌아가신 뒤로 생전 제사 한 번도 안빼먹었소. 돌아가신 뒤에 그러믄 뭣하냐 하시지만 그라도 짠해서. 차를 몇 번씩 갈아타고 옛날에는 요리 직행이 많이 오르락 내리락 하잖아요. 몇 번씩 갈아타야 광주를 가는디 생전 안 빼고 제사모시고 그라네요.
- (호랑이가 아버님을 지켜주신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뒤에서 불 켜 겨눈 놈이 무섭제 앞에서 불 켜고 인도하는 놈은 괜찮하다고 그라다라구요. 그랬는디 그러고 모르고 애를 탔구나.
- (아버님이 도깨비불에 홀려서 길을 못 찾으니까 호랑이가 아버님을 집에까지 모셔다드린 것 같은데요.)
인자 생각해보니 대차 그란디, 그때 당시엔 그것도 저것도 아니고 간이 쪼그라 들어부렀제. 일본놈 때문에. 일본놈 때문에.

 

 

 

 

 

 

 

 

                                                               구술중인 김영자씨

 

 

 

 

 

 

 

 


자료번호 / 06_12_08_MPN_20160712_KYJ_0002
제보자(구술자) / 김영자(여, 75세, 반월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