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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면

[유치면] 3남매의 한국전쟁… 적군과 아군의 경계에서

장흥문화원 2017. 10. 25. 09:55

 

 

 

3남매의 한국전쟁… 적군과 아군의 경계에서
▶ 한국전쟁 중에 반란군 소년단장으로 활동했던 구술자와 반란군 소대장으로 화악산 전투에서 사망한 형님 그리고 반란군에 참여했다 국군장교와 결혼한 누이의 적과 아군의 경계에서 죽거나 살아난 이야기.

 

 

내가 4남 1녀 막둥이인데, 우게 형님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출신이여. 반란사건 해체되고 여그 유치 와가지고 여그 있으면서 유치면에서 젊은 사람 여남은 명을 조직을 했어. 그래도 반란사건을 투명을 갖고 여그서 지키고 있어. 근디 경찰이 잡으러 댕개. 경찰이 잡으러 오면 때려 묶어다가 방에다 가둬 놓고 총을 빼어 불고 빼어 불고 그래. 우리 형님이 말하자면 두목이여. 근디 그전에는 벽이 벽돌이 아니라 흙으로 지었잖아. 근께 경찰이 밤에 벽을 뚫고 내빼부렀어. 그래갖고 옴천, 장흥, 강진 3개 군 경찰이 합동작동으로 와서 여나뭇을 잡아가버렸어. 싹 다 잡아가 목포 형무소에 가둬 부렀거든. 나도 형님한테 면회도 가고 그랬는디. 인자 6·25 사변이 터져 밀고 내려오니까 전부 엮어다 00강물에 빠져 죽여부라고 명령이 내려왔어. 명령이 내려온께, 나로서는 외숙인 이향달씨가 당시 나주 국회의원 2선 하신 판이었는데, 그 양반이 우리 형님을 빼다가 서울 형무소에 갖다 넣어부렀어. 나머지는 목포 형무소에서 싹 엮어서 00강물에다 빠쳐 죽여부렀어. 다 죽여부렀어. 하나도 없이. 우리 형님만 살았제. 서울 형무소에 갇혀 있는데 갑자기 밀고 내려와분께 못 죽이고 나와분께, 이북 인민군들이 (형무소) 문을 열었제. 그때 교도소에 갇힌 사람은 전부 다 사상자들이잖아. (인민군이) 그 사람들을 딱 조직해서 배치를 해갖고, 일개 소대 소대장으로 만들어갖고 배치를 시켜갖고 내려 보낸 거여. 앞잽이 시켜 내려 보낸 거여. 전쟁을. 그래갖고 그 형님이 일개 소대 병력을 데리고 소대장 역할을 하고 여그로 내려왔어. 6·25 사변 때는 유치서 깃발 날렸제. 인자 소대장님 되고 그랑께. 그랬는디 인천상륙을 해갖고 중간에 짤라분께 못 가부렀제. 그래갖고 화악산에 머물러부렀제. 인천 우그로는 다 올라가고 밑으로는 못가고 여그 화악산에서 다 죽어버렸제. 수만 명이 죽어부렀어. 내 우그로 뽀짝 누나는 또 뭔 수가 있는고는, 얼른 말하자면 우리 가족이 전부 반란군 가족이 되어부렀어. 누나도 반란군을 댕개. 그란디 유치 지서장이 장 뭐시기여. 그때 당시에는 가족들을 싹 죽여불잖아. 그래도 우리 종씨들이 유치 지서를 딱 잡고 있응께 우리 가족은 한나도 안 죽이고 살려줬어. 그란디 반란군 다니는 누나를 잡어 갖고 못 가게 한께 밤에 뛰어 내빼 갖고 또 반란군으로 가부러. 그래 갖고 우리 누나는 인천상륙 우게까지 내빼 갖고 이북으로 건너 가다가 잽혔어. 장교가 잡아다가 지그 집에다 갖다 놔두고 결국 우리 누나하고 결혼까지 해서 살았거든. 우리 누나는 그런 역사가 있고. 형님은 거그를 못 넘어가고 화악산에가 있는디, 내가 6·25 사변 때 유치 사람들을 이 아래 금사정이, 당산, 월정 거그다가 딱 주둔시켜서 거그다가 살려. 그란디 저녁이면 형님이 늘 와서 자수를 할라고 연구를 해. 그란디 자수를 하면 경찰들이 가족을 죽여부러. 유가족이라 해서. 그랑께 아버지가 자수를 못하게 해. 그래서 자수를 못했어. 자수만 하면 그때만 해도 내가 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어. 어렸어도 좀 부잡하게 돌아다녀 갖고. 그란디 자수를 못하게 한께 할 수 없이 자수를 못하고 있고 내가 6·25 후에 여그서 삼시로 소년단장을 했어. 열시 살 니 살 먹었는디. 소년단장을 한께 내 속으로 또글또글했제. 그란디 아버지가 (형님을) 자수를 못하게 해 나도 죽고 남은 성까지 죽는다고. 그래 갖고 조 뭐시기라고 다리 가에 사는 양반이 우리 형님하고 같이 있었어. 화악산에 가서. 그 사람이 화악산 전투할 때에 형님이 총 맞아서 죽어간께 자기 손으로 묻어 놓고는 자수를 해 부렀어. 요기로 나와 부렀어. 그래서 형님이 죽었다는 걸 알았제. 그때는 자수를 하면 무조건 멸공대라고 조직을 했어. 경찰 앞잽이여. 선발대. 그랑께 제일 먼저 죽제. 그분도 자수까지 했어도 멸공대하다 글로 결국 죽었어. 그래 우리 형님 시체도 못 찾고.
- (소년단장이면 경찰 편인가요?)
아니, 반란군 편이제. 그때는 유치사람은 무조건 전부 다 반란군 편이여. 저쪽 편을 못 들어.
- (그럼 그때 형님이 자수하면 어떻게 살릴 수 있었다는 거예요?)
나로 해서 형님 된 사람이 그때 당시 육군본부 배차계에서 근무한 소령이 한나 있었어. 그 사람이 나하고 형제간이제. 우리 형님하고도 형제간이고. 같은 집안이여. 근디 그 사람이 여그와서 반란군한테 잡혀 부렀어. 그래 죽일라고 데꼬간께 우리 형님이 여그서 소대장쯤하고 짱짱한께 깃발이 있제. 그래 빼다가 장흥으로 보내 살려줬어. 그랑께 그분이 (형님이) 자수만 하면 자기가 살릴라고 딱 대기하고 있었어. 그란디 자수를 못 해 부렀어. 그래 갖고 죽었어. 그 육군본부 형님은 아직도 살아 계셔.

- (어르신은 화악산 전투 때 경찰 편에서 싸웠다면서요?)
그때는 다 밀려 가 불고 경찰들이 여그를 점령을 했잖아. 당시에 내가 여그서 소개당한게 아니고 단산에서 살았어. 그란디 조금 젊은 사람은 반란군처럼 생겼으면 잡아가부러. 젊은 놈들을 데려가. 지그 편 만들라고. 그랑께 어린 것들만 남아 있어. 그래 내가 6반 반장을 한디, 소개 당해갖고, 긍께 그때는 경찰 편이제. 그란디 11사단이 화악산 작전을 내려왔어. 근디 거그서 조금 또글또글 한 놈들만 뽑아 갖고 전선 가설하고 작전할라고 그런 것 한 디를 나하고 신풍 문 뭐시기라고 있는데 그 사람하고 둘이 갔어. 경찰들이 (명단을)을 뽑아서 군인들 줬것제. 그래 갖고 건동이란 디 뒤 호재에 가, 그 너머가 화악산이고, 거기서 내려다보면서 작전을 할라고. 그 호재까지 옛날 삐삐선으로 전화선을 빼대. 우리가 거그 가서 그걸 하고 그래서 화악산 전투 작전을 하는지를 알았제. 영암, 강진, 장흥 반란군 사령부가 화악산에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 대장이 자기 비서 둘을 데꼬 자수를 해부렀어. 내려 와 갖고 하는 말이 “어제 5명이 와서 선 뻗댈 때 죽여 불라다가 죽여봤자 우리는 도저히 다 죽은께 내버려 둬불자 해 갖고 우리는 자수하러 나왔다”고 했어. 글 안 그랬으면 우리 다 죽었제. 나도 죽어 부렀제.
- (반란군 편에서 소년단장을 하다가 인민군이 올라간 후 잡혀서 경찰 편이 된 거네요?)
그라제. 그란디 잡힌 것은 아니고. 당시에는 경찰들 몰래 소년단장을 하제. 경찰들은 모르제. 소년단장을 하고 소년 조직해갖고 반월에가 한 20명 되았어. 소년단이. 내가 반장을 하고 그랬는디, 6·25가 폐쇄되아 불고 딱 가분께, 경찰들이 점령을 해분께, 인자 또 경찰 편으로 가야제 인자[크게 웃음]. 살랑께.
- (그때 형님은 화악산에 숨어 계셨고요?)
응, 그래갖고 거그서 돌아가셨고.
- (어른신이 전선 설치하러 화악산 쪽을 갔을 때도 형님은 화악산에 계셨어요?)
그 전에 돌아가셨고. 돌아가신 뒤제. 그 화악산이 아조 지하에다 반란군들이 수 천, 수만 평을 굴을 파서 주둔하고 살았어. 반란군이 어떻게 해서 행정이 되었냐면은, 이북에서 밀고 내려와 갖고 인천까지 내려왔어. 그래 갖고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을 싹 끄집어 내 갖고 그 사람들 조직해서 딱 맨들어 놓고 지그들은 싹 들어가 부렀어. 한나도 없었어. 인민군도 없었고 이북 군인도 한나도 없었어. 남한 사람들끼리 싸움을 붙여 놓은 것이여. 그랑께 영암 경찰, 장흥 경찰, 강진 경찰이 영암 유격대, 장흥 유격대, 강진 유격대하고 싸운 것이여. 그렇게 전쟁을 붙여 놓고 지그는 들어가 분 것이여. 어떻게.

- (누님은 잘 사셨어요? 장교하고 이념이 안 맞잖아요?)
이를테면 적하고 적하고 산 폭이제. 따지면. 그란디 누나가 인물이 이뻬. 그랑께 지그 집에다 갖다 놔두고 있다가 숨켜 놓고 있다가 제대하고 나와서 같이 결혼해서 살았어. 잘 살았어. 4남매 낳고.

 

 

 

 

 

자료번호 / 06_12_08_FOT_20161208_JSY_0001
제보자(구술자) / 장수용(남, 77세, 반월 1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