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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면

[부산면] 일제강점기 고초를 겪은 유량마을 유기장인들

장흥문화원 2017. 11. 8. 11:21

 

 

 

일제강점기 고초를 겪은 유량마을 유기장인들
▶ 유량마을은 주민들 사이에 ‘유기마을’로 통하는데, 조선중엽부터 1962년까지 마을전체가 유기를 제조하며 부유하게 살아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군들이 총알을 만들기 위해 유기 재료인 신주를 강탈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큰 고초를 겪었다. 한 유기장은 신주를 숨기고 일본군에 저항하다 절도죄로 유치장에 감금되었는데 억울함에 스스로 벽에 머리를 박고 자결했다.

 

 

옛날에 우리 마을이 집성촌이 아니라 타 성 간이 이렇게 모아서 사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마을 형성이 힘들었지. 그래 가지고 경주 김씨하고 여씨가 여그로 와 집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우리 마을이 조리 형국인데 담았다가 풀어 부니까 재산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어요. 그란디 우리 마을이 버드나무가 많이 있는데 버드나무 가지에 노란 꾀꼬리가 앉으면 마을이 번성한다 해 갖고 그 때부터 유기 제조가 번성한 거예요. 유기가 노란 색깔이잖아요. 금 색깔. 담양서 우리 여 가들이 내려와 집성촌을 이루게 됐제. 유기가 62년도까지 여기서 했었어요. 스텐레스 나오면서 유기가 폐기되면서 안 섰지.
- (마을 주민들 모두 유기를 만들었어요?)
유기 공장이 4개 갖고 있었제. 전부 다 글로 먹고 살고 그랬어요. 생산하면은 각 호당 다니면서 팔고 시장에 가서 장터를 개설해 가지고 거기 가서 또 팔고. 장흥군 전체를 다 돌았어요. 지금은 기술자만 한 둘 있고 없어.

- (기술은 장인 지정을 통해 보존되고 있나요?)
아니, 장인 지정도 안 해 줬고. 내가 유기 공장을 다시 해 볼라고 군과 면을 찾아가 보았지만, 면전에서 하겠다는 면장도 있었지만, 전부 자기들이 안 해 불고 또 마을에 방해하는 사람이 하나 있어갖고 안 할란다고 해 갖고 안 해 부렀제.
- (현재 명맥이 끊긴 건가요?)
진즉 62년도 이후로 끊어졌지.
- (유기 생산이 한창일 때 마을이 부유했겠네요.)
대단했죠. 부산면서 돈을 가장 많이 주무른 데가 여그니까. 62년도 후에 유기가 폐쇄되면서 폐촌 되다시피 했어요. 그때 이후 우리는 어렵고 내세울 것도 없으니까 천대 받고 그랬제. 유기 때문에 한 때는 부유했지만 유기 안 한 후로는 경제권이 없어져 부니까.

- (당시 생산한 유기는 전국으로 팔려 나갔겠네요.)
유기가 두 가지 종류에요. 방자 유기가 있고 주물 유기가 있고. 여그서 처음엔 방자유기를 하다가, 방자 유기가 비싸거든요, 그래서 여그서는 주물 유기를 한 거예요. 유기가 지금도 상주하고 안성, 수원, 보성, 거제에서 조금씩 나오긴 나와요. 그런데 다 방자 유기에요. 그래서 비싸요.
- (마을에서 유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마을에서 유기 사업이 한 1800년도부터 일거에요. 조선 중엽부터 시작했으니까. 지금은 전부 없어져 버리고 집 지서 불고 그랬제. 당시에는 공장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자체가, 인자 아래채에 유기 제조소가 있었제. 네다섯이면 했으니까. 유기 만든 사람이 있고 깍은 사람이 있고 보조가 있고 하니까.
- (유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 같은 건 없었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공출, 인자 놋쇠, 신주(유기의 쇠인데 합금해서 유기를 만든다) 같은 것을 착취를 해 가면서 공출을 하라고 했거든요. 안 하니까 우리 할아버지를 절도로 몰았어요. 장흥 유치장에 갖았거든요. 할아버지 성격이 거시기 하니까 거기서 벽에다 머리를 박어 버리고 돌아가셨어요. 당시 일본 사람들이 대포 총알을 만들기 위해서 뺏어 갔어요. 곰쳐 놓고 안 주니까 할아버지를 엮을 방법이 없잖아요. 우리 마을에 반공호가 대밭에가 한 네 군데 정도 있었어요. 거그에 묻어 놓고 안 주니까 할아버지를 유치장에 몰아넣은 거예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한 이삼년 후에 해방됐어.
- (할아버지께서 죽어도 일본군에게는 협조할 수 없다는 각오였겠네요.)

그렇죠. 우리 할아버지 형제간이 사형제인디 한 분은 일찍 돌아가시고 삼형제가 다 유기공장을 했어요. 삼형제가 다 고초를 겪었죠. 제일 큰형은 여그서 하고 막뚱이 동생은 양촌서 하고 그 다음에 거시기 저기 도로변에서 하고. 모두 62년도까지 했제. 전부 다 그 때 당시 고초를 하고 유기 갖고 다니면 뺏기고 그랬제.
- (유기 제조 기술은 전승하였어요?)
어렸을 적에 보고 했는디, 합금하는 방법은 기억을 못하제. 그래도 만드는 과정은 지금도 훤하제. 광양과 포항에 제철소가 생긴 이유가 있어요. 쇳물을 부술 때 일반 흙은 튀어요. 폭발하거든요. 근디 광양 갯벌하고 포항 갯벌은 안 튀어요. 그래서 그쪽에 세운 거예요.

 

 

 

 

 

 

                               유량마을

 

 

 

 

 

 

 


자료번호 / 06_12_09_FOT_20160727_YYJ_0001
제보자(구술자) / 여용주(남, 70세, 유량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