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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면

[회진면] 1960~1970년대 회진항 풍경 회고

장흥문화원 2017. 11. 17. 09:18

 

 

 

1960~1970년대 회진항 풍경 회고
▶ 회진에서 태어나 젊어서 도시에 나가 살았던 7년간을 빼고는 죽 회진에서만 살아온 구술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1960~1970년대) 보고 겪었던 회진항 풍경을 떠올려 그려 보였다. 그때로부터 기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왁자하고 풍요롭던 항구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쓸쓸함만이 남았는가. 그때 그 시절처럼 왁자지껄한 회진항을 소망해본다.

 

 

나는 회진에서 1961년 5월 열아드렛 날 태어나가지고 광주 고등학교, 대학교를 서울서 가가지고 다니다가, 한 2년 다니다가 군대 갔다 오고… 그러니까 고등학교 3년, 군대 2년, 대학교 2년, 7년을 제하고는 회진서 산, 어떻게 보면은 토종이죠, 토종! 회진에서 이때까지 쭉 살아오면서 근데 내 아주 어렸을 때, 내가 61년도에 태어났는데 이 원이 아마 65년도에 준공이 됐다고 그러는데 그때 당시, 내가 태어났을 때 아마 이 원을 시작했지 않았겠느냐, 막기 위해서. 그렇게 추측이 되어지고 그래서 그 기억들은 가물가물해. 인자 어떤 기억이 내가 행선에서, 내가 동네 젤 윗집에서 살았는데 아주 어렸을 때 거기 마늘밭에서 쫑기 따먹으면서 이거 보면서 뭐가 이렇게 구루마들이 와갔던, 이렇게 사람들이 오고 가는 그런 모습들이 그게 내 상상이었는가 실지 봤던 것이었는가 정확한 기억은 없어. 그런데 아무튼 내가 그 행선 거기 밭에서 이렇게 마늘 쫑기 뽑아 먹으면서 보니까 아무튼 사람들이 오고 갔던 그런 모습들이 희미하게 하여튼 지금 있는 거 같애. 그것이 아마 다른 사람들 말을 들었는가 어쩐가 모르는데 인자 그때 당시에 보면서 내가 어렸을 때 인자 회진에 큰 배들이 이렇게 돌아다니고 그랬던 상황들이, 지금 내가 인제 쉬언 여섯인데 이렇게 오늘날 와서 딱 놓고 보니까 회진이 허망한 거야. 너무 뭐 이렇게 개발도 되고 발전이 됐다고 하긴 하는데 오히려 내가 회진항을 바라보는 그런 어떤 항은 옛 모습 한나도 없어. 오히려 이렇게 깨끗하게만 돼 있다뿐이지 옛날에 이렇게 여객선들이 돌아다니고 막 사람들이 박작거리고 그런 모습들이 한나도 없어가지고 오히려 우리 회진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후퇴해버리지 안했느냐… 그렇게 해서 내가 인자 어르신들을 이렇게 또 찾아다니고 이렇게 들으면서 회진항에 이렇게 들어들었던 배들을 나름대로 조사도 한번 해봐지고 그랬는데, 거기에 따른 과정들을 한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소이다. 제일 먼저 내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뭐 아홉 시가 되면은 뭐 겸농호란 배가 이렇게 딱 들어오는데 겸농호 그 배가 아마, 나중에 내가 인자 아는 것인데 여기 인자 득량만 아래쪽에 있는 금당, 금일, 어… 생일, 여기 인자 약산 이쪽에 거기 육지로 나오는 유일한 통로가 회진인 걸로 알고 있어, 회진. 그때는 마량도 없었고 또 연륙도 안 됐었고. 전부 다 이 회진으로 이렇게 왔었는데, 그 겸농호가 유일한 회진으로 나오는 통로인데 그 겸농호, 아홉 시 이렇게 딱, 회진항으로 딱 들어오면은 배가 잠방잠방해. 사람들이 막 배에 엄청나게 막 실려 있고, 막 이것저것 막 수산물들이 겁나 이렇게 있고, 그렇게 인자 많은 손님들을 실고 여기 딱 아홉 시 정도 되면은 딱 배가 이렇게 딱 들어오는데 그러면은 마 여기에 거기 인자 그 섬사람들이 가지고 나온 수산물, 인자 주로 수산건어물 같은 것들이 뭐 되겠죠? 뭐 멸치나 미역이나 뭐 다시마. 요런 해초류, 해조류 같은 걸 비롯해서 그러면 여기에 있는 인자 장사꾼 아짐들이 그놈을 어떻게 좀 싸게 살라고 그렇게 막 이렇게 물건을 갖고 나오면 잡어, 잡어 마치 자기 거인 것처럼. 그렇게 물건을 막 잡은다 말이여. 그러면 거기 섬사람은 어떻게 하든 여러 사람들한테 흥정을 붙여가 쫌 더 이렇게 비싸게 팔라 하고, 그 사람은, 먼저 잡은 사람이 마치 자기 거인양 이렇게 자기가 맘대로 가격 매겨 강제로 살라 하고 그런 진풍경들이 막 벌어지고… 또 인자 거기 인자 여기에 인자 옛날에 그때는 직행버스가 아니고 급행버스였던 것 같은데 뭐 지금은 다 인자 뭐 차들이 뭐 이렇게 특정 큰 지역만 직혀서(거쳐서) 가는 직행버스, 지금은 인자 급행버스가 있었는데 급행버스가 [뒤쪽을 가리키며] 터미널 여기에서 대기한 것이 아니고 [앞쪽을 가리키며] 저어기 부둣가에 가서 대기를 해. 그러면은 그 손님들이 나오면은 거기 인자 손님들 저기서 바로 실고 출발할라고 그러면 막 배에서 나온 손님들이 서로 막 차를 탈라고 달려오고 막 난리 아니겠어. 그런 풍경들이 아홉 시 면은 쫙 벌어진단 말이야. 그러면 그때 참 내가 보기에도 너무 북적거려, 도시 어느 항구 못지않은 그런 어떤 어… 큰 어떤 항구다, 그런 느낌을 받고 딱 이렇게 컸고, 또 열 시가 되면은 인자 태안호란 배가 들어오는데 태안호란 배는 엄청나게 큰 배여. 마 완도에서, 완도항에서 이렇게 출발을 해가지고 그 어디더라? 거기, 어… 고금도하고 약산하고 거기 지금은 뭐, 엊그저께 가서 보니까 다리가 놔졌더라고. 그 사이로 해가지고 이렇게 인자 약산 어두지 쪽으로 해가지고 회진으로 들어오는데 그 배는 어떻게 생겼으까? 아무튼 내가 알기로 군함같이 생겼다고, 생겼던 것 같애. 아래는 쫌 시커마니 이렇게 검정색이었고 위에는 마 흰색이었던 거 같애요, 흰색. 이제 그 배가 부우웅! 하고 이렇게 뱃고동 소리를 딱 짝, 인자 뺑 돌아오기 전에 한번 딱 울리는데 회진 뒷산에 가면 부웅 한 번 울리면 저기서 또 이렇게 메아리로 부웅 울리고, 좀 있으면 쩌기 천관산에까지 이렇게 메아리가 뱃고동 소리가 울려가지고 회진까지 이렇게 들리는 그런 굉장히 하여튼 컸고, 그 웅장한 소리가 회진 온 동네를 아무튼 이렇게 싹 울릴 정도로 그런 웅장한 뱃고동 소리였어요. 그런데 인자 나중에 인자 이렇게 이 원이 인자 막어지기 전에 그 전부터 이 태안호는 이 회진항을 들어왔는데 그때 당시는 여기 물살이 아주 셌다고 그래요. 여기가 인자 1965년도에 아까 처음, 서두에 말했지만은 간척이 되어가지고 지금은 인자 그 흔적이 없어져버렸는데 여기 물살이 얼마나 셌냐 하면은 뭐 나룻배 이야기 대충 했지만은 이 태안호가 저기에 인자, 그때는 이렇게 배가 접안 시설이 없기 때문에 일명 우리 그때 종선이라고 그러는데 종선, 종선… 큰 배가 있으면은, 큰 배가 있으면은 그 쩍은(작은) 배로 해서 손님들을 실고 이렇게 노 젓고 가 가지고 큰 배에다 실어주고 이렇게 또 표 이렇게, 거기서 배에서 내린 손님들 실고 다시 오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인자 큰 배로 올라가고 내려오고 그러는데 물살이 하도 세기 때문에 저, 저기에다가 저쪽에만큼 배가, 태안호가 정박했으면 그 물살에 의해서… [옆쪽에서 뒤쪽을 죽 가리키며] 저렇게 해가지고, 쩌기 쩌기 덕산 끄트머리 있죠, 축사 있는 데. 저기까지 배가 밀려간대 그 물살에, 물살에. 그렇게 해서 이렇게 손님들 실고 여기서 이렇게 또 가고 뭐 그렇게 했는데 그 태안호는 주로 인자 회진 사람들이, 여기 회진뿐만이 아니라 대덕이고 관산이고 여기 인근 지역에서 나는 쌀들을 주로 실고 이렇게 부산으로 주로 인자 많이 갔고, 주로 인자 가을에는, 봄가을에는 쌀과 보리, 겨울부터 이른 봄에는 여기에서 인자 김이 많이 났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김을 지금 이렇게 뭐냐, 빡스가 그 뭐지? 빡스 이렇게 종이로 된 빡스 있지? 그런 빡스에다 김을 지금은 담았는데 그 전에는 거기다 담은 것이 아니고 나무판자로 이렇게 싸. 나무판자를 짜 가지고 거기에다 김을 담어 가지고 인자 그 빡스가, 나무 상자로 된 거를 태안호에다 실어가지고 인자 부산으로 이렇게 인자 간단 말이야. 여기에서 나간 것들은 여기에서 주로 생산되는 쌀과 보리. 겨울 봄 같으면 김을 갖다 부산으로 실어날르고 주로 들어오는 물건들은 여수나 부산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뭐였냐면은 선구 자재. 예를 들어서 인자 선구 자재라면 뭐라고 할까? 고기를 잡는 데 필요한 그물이나 뭐 그러한 어떤 것들을 실어오는, 다시 말해서 우리 지역에 없는 어떤 더 이렇게 발달된 지역에서 우리 지역의 어민들이 그 고기를 잡기 위한 또는 어떤 뭣을 시설하기 위한 그런 어떤 선진 물품들을 주로 회진항으로 이주를 해가지고 여기에서 인자 인근 섬 지역에까지 전부 다, 여수에서 이렇게 일명 신진물품이라 해야 될까, 뭐라 해야 될까? 하여튼 그런 것들을 이렇게 가져 와가지고 여기에 이렇게 또 섬 지역으로 가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어떤 물류의 어떤 그런 물류의 고장? 물류의 어떤 뭐라고 해야 할까? 물류가 서로 어떤 이렇게 되는 어떤, 어떤 무역중심지! 뭐 그런 역할을 했던 그런 인자, 그런 고장이었었죠. 그렇게 해서 인자 회진에 열 시가 되면 이렇게 태안호가 부웅 들어오고, 그렇게 인자 많은 물건들이 들어오고 그랬었고, 인자 또 그것은 그 배는 아마 완도에서 그란께 거기에서 한 여덟 시에나 되면 출발을 하는가 모를까 회진에 오면 딱 열 시 배, 열 시 배. 그렇게 해서 그 배가 딱 나가고 나면은 인자 뭐 뭐 길성호 그 배는 놔 두고, 인자 다시 인자 또 오후 두 시가 되면은 크은 배가 한나 들어와. 큰 배 그 배는 어디서 오냐 그러면은 인자… 부산에서 그 앞날 저녁에 출발해갖고 충무하고 삼천포, 여수를 거쳐서 녹동을 거쳐서 회진으로 오는 배제. 두 시 배는. 그란께 그 앞날 열 시에 회진 와 가지고 갔던 배가 부산 가 가지고 그 다음 날 회진 들어오는 것이 오후 두 시여, 오후 두 시. 그 다음 날 두 시. 그라믄 다음 날 두 시에 이렇게 인자 들어오고, 그라믄 아까참에 내가 말했는데 주로 인자 여수나 부산은 이렇게 좀 주로 이렇게 우리 어민들이 필요로 하는 선구 자재, 물품들을 싣고 오는 그런 역할을 했었고, 여기서 나가는 것들은 주로 인자 김, 쌀, 미역들 실고 간 것이고 들어오는 물건들은 인자 주로 인자 그것들이었고. 그 다음에 또 인자 세 시가 되면은 인자 겸농호가 여기에서 인자 나가는데, 그 전에 겸농호가 하루에 여기에서 2회 운항을 했어, 2회 운항을. 인자 여기에 있는… 겸농호가 인자 금당, 금일, 약산, 생일도 이쪽에서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육지로 나오는 길이 회진이기 때문에 손님들이 하도 많애 가지고 한번에 다 안 돼. 그란께 인자 아홉 시에 들어와가지고 아홉 시 40분, 열 시 못돼서 다시 한 번 저기 인자, 저 금일하고 생일도만 들러 갖고 다시 오는데, 그 배가 여기에서 인자 다시 두 시쯤에 들어왔다가 대기했다가 세 시쯤 되면 출발을, 출항 준비를 하는데 그때 당시엔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앴던가 모르겠어. 인자 주로 짐들도 많앴었고. 이렇게 인자 아마 여름이 되면은 배에 제일 많이 실렸던 것들이 지금도 보면은 그때 당시에 내 기억으로는 아마 띠가 혹시 아까?(알까?) 띠, 띠? 띠가 아마 우리 키 정도씩이나 막 커…. 갈대하고 비슷한, 비슷한 것인데 어렸을 때 인자 보면은 우리가 이렇게 거기 뿌리를 캐면 다디 다잖아. 그거이 쫌 더 크면은 삐비를 뽑아먹고 그것을 내가 먹을려고 했더니 빼 먹을려고 했더만은 주인이 그거를 못 캐 먹게 막 말려. 그거를, 그때 당시엔 나는 몰랐어.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우리가 인자 군것질 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풀뿌리를 이렇게 뽑아 먹으면 그 삐비 뿌리를 이렇게 벗겨 무면(먹으면) 달착지근하고, 나중에 이렇게 이른 봄에 이렇게 좀 꽃이 피기 전에 이렇게 살짝 고런 삐비 먹으면 다디다잖아. 고놈을 못 빼 먹게 인제 막 말겨, 주인이. 나중에 알고 봤더니만 그것이 커서 띠가 된 거여, 띠가. 띠가 되면은 그놈을 이렇게 비어서 이렇게 팔, 섬사람에게 팔면은 그 띠를 이 정도나 이렇게 [두 손으로 크기를 가늠하는 시늉을 하며] 우리 키 정도씩 어른 키 정도씩 하는 그 띠를 말겨 가지고 비어가지고 그놈을 발짱을 만들… 팔기 위해서 우리가 못 캐먹게 말겼던 것 같애. 아, 그전에는 뭔 요걸 갖다 못 먹게 한다냐, 상당히 불만이 많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띠 뿌리를 캐먹지 못하게 하고 또 이렇게 그 삐비를 못 뽑아 먹게 했던, 말겼던 것은 그것을 상품화해서 팔라고 그랬던 것 같애. 그래 또 겸농호에 보면은 여기 주로 인자 섬에는 그거 인자 띠, 띠들이 많이 안 나오잖아. 주로 인자 천관산 저쪽에 산기슭에서 크는 거 보니까. 그런 것들이 몇 구루마 수십 구루마가 겸농호에 실려 있고 또 인자 일이 바뻐서 발짱을 못 친 사람들은 그 띠를 해갖고 그 산촌 사람들이 잘러 가지고 발짱을 만들어가지고 팔잖아. 이렇게 그런 짐들이 겸농호에 몇 구루마씩 실려 있어. 그런 배들을 실려서 가고, 잠방잠방 배가 또 인자 그 정도로 이렇게 실고 간단 말이여. 그런데 하루는 겸농호 거기에 선장…이 아닌 거기 겸농호에 있는 선원한테 들은 이야긴데 여기에서 인자 저기 금일로 가기 전에 칠기섬에 갔는데 물살도 쎄고 그러니까 배가 이렇게 뭐 딱 침몰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은가 봐요. 그러니까 하도 인자 겁이 나가지고 거기에 배에 실렸던 사람들 전부 다 내려가지고 칠기섬에다가 다 내렸어. 얼마나 사람들이 인자 많이 실렸던가 그때 당시에는 뭐 이렇게 선원 제한이, 승선 인원이 뭐 정해졌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거기서 내리라 해놓고 짐을 갖다가 금일 가서 이렇게 화전인가 갔다가 다시 와가지고 사람을 실고 가고, 그 정도로 여기가 번화했던 지역이여.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지금 회진항이 이렇게 인자 간척도 돼버렸고 여객선 한 척도 안 드나드는 죽은 항이 돼 버렸어. 그래서 아~ 내 속으로 그래. 어렸을 때 봤던 그런 어떤 추억들, 참 쓸쓸함. 이런 항이, 죽어버린 항이 되지 않았느냐. 그래도 우리 회진항이 예전에는 그래도 전남 서남 해안의 이 중심 항으로써 특히 이쪽에 금당이나 금일이나 생일 뭐 이쪽에 어떤, 거기에 유일한 어떻게 통로였었는데 이런 부분도 없어져버렸고, 더더욱 더 아쉬운 것은 우리 장흥 노력항에서 제주도를 오가는 그 오렌지호라는 배가 있었는데 아마 이 배도 지금 안 다니고 있어가지고, 이 배라도 다니면 쪼끔이라도 위안이라도 될 것인데 이런 부분도 안 돼 가지고 참 우리 지역이 갈수록 이렇게 낙후되어지고 쫌 소외되어지지 않느냐.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 회진 지역이, 우리 회진항이 옛날의 그 어떤, 그런 명성은 되찾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우리 회진항이 노력도 항이라도 개발돼가지고 옛날의 그런 전성시대의, 어떤 그런 풍경들을, 왁작찌껄하는 우리 회진항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내 소망입니다.

 

 

 

 

 

 

 

 

                                                  동구마을과 회진만

 

 

 

 

 

 


자료번호 / 06_12_10_MPN_20160905_YJS_0001
제보자(구술자) / 이제석(남, 56세, 동구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