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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읍

[장흥읍] 한국전쟁 때 마을사람 모두를 살렸던 당산제

장흥문화원 2017. 9. 13. 13:59

 

 

 

한국전쟁 때 마을사람 모두를 살렸던 당산제
▶ 송암마을 당산제는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데 지금은 당산나무 앞에 제단까지 마련하여 이어오고 있다. 당산제를 모시고 나면 마을사람 모두가 나와 같이 흥겹게 놀며 화합을 다졌다. 이 정신으로 한국전쟁 때 인민군 편에 들었던 사람들도 모두 숨겨주어 마을에서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

 

 

어려서 그 당산제 모신 것을 보면은 15일 전에 초하루를 막 지나면은 이주 동안을 부부가 합방도 안하고, 가운데 방안에다 물동이를 놓고 이렇게 그 한방에서 지내지만은 매일 또 이렇게 정화수를 떠다가 목욕을 하고 그렇게 정성을 들이고. 여기다가[당산나무를 가리키며] 인제 이렇게 해서 딱 방을 붙이는데, 누구누구가 유사하고 누구누구는 인자 징, 꽹가리, 그런 것까지 고수 분 뭐 해서 전부 나이를 해서 붙여가지고. 그 초저녁에는 옛날에는 이렇게 길이 있고 그랬었는데, 일체에 부녀자들은 집에서 못나오게 하고 당산제를 모신데 선발된 분들만 나오셔서 제를 지내면 약 새벽 두 시경, 보름날 두 시경에 끝나는데. 그 끝나고 인제 그때부터 마을화합 차원에서, 옛날에 제가 20대 때 보면은 남녀가 유별한데 남녀노소가 전부 그 새복 두 시까지 기달렸다가 모두 나오셔서, 그 모두 둘레를 하고 모닥불을 피고 그래가지고 날이 샐 무렵 동틀 때까지 국악을 치면서 그 마을 화합을 즐기고. 또 다음날부터는 연이어서 한 일주일 동안 그 보름이 돌아올 때까지 마당밟기 이런 것을 하면서. 그래서 볼 때 아마 그래서 그 쪼끔 인제 도의적으로 봤을 때 남녀가 유별인데 그러냐 하는 거여. 무례가 아닌 마을의 그 친할 목적으로 그런 저기를 했었어. 그것이 산 증언으로 쩌그 6·25를 여기서 겪었는데 때 아닌 한두 사람이 타의적으로 저쪽 그 인민군 뭐 저기로 편을 들었다가. 우리가 복구돼서 모도 경찰들이 그 분들을 잡으러 왔을 때, 이렇게 마을 그 오묘한 곳에다가 다 숨겨서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고발되지도 않고 사상자도 안 나오고. 이래서 그 당산제를 모시면서 다진 화합이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왔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인제 지금도 그 선대들의 뜻을 어기지 않고 이렇게 저 제단까지 설치해서 당산제를 지금도 모시고 있고, 내가 이것을 하는 동안에 송암리라는 마을도 없어짐이 없이 이어가지 않겠느냐, 그런 기대를 해가면서 합니다.

 

 

 

 

 

 

 

                                                                                       송암마을 당산나무

 

 

 

 

 

 

 

 

                                                                     송암마을

 

 


 

 

 

 

 

자료번호 / 06_12_01_FOT_20160920_CYS_0001
제보자(구술자) / 최육수(남, 76세, 송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