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2017/11/07 8

[유치면] 옛 보림사에 대한 기억

옛 보림사에 대한 기억 ▶ 보림사가 전소되기 전 구술자가 본 보림사의 인상을 전했다. 특히 부처들이 노인의 모습을 하고 둘러앉아 있던 절방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옛날에 노인들이 사랑방에서 삐치고 글믄 고개를 틀고 그러잖아요. 그런 형태로 삥 둘러갖고 있는디 한 부처만 그렇게 있어요. 틀어졌다 이거요. 그래서 고개를 휭 돌리고 있는 거제. 참말로 사찰 말할 게 없어요. 제가 댕긴 중에는 그런 사찰이 없어요. 다 소각시켜부러갖고. 그전에만 해도 사천왕은 이렇게 열고 들어가믄은 임신한 부인들은 잘 못 들어갔어요. 까딱하믄 낙태. 왜냐하믄 뭘 잘못했다거나 안 들어 갈 데를 들어가거나 하믄은 사천왕 옆에가 방망이 들고 있어요. 이게 후르르 하니 나와부러요. 그란디 다 소각 되어불고 이루 말할 수 없어요. - (..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보림사 파밭이었던 대삼마을

보림사 파밭이었던 대삼마을 ▶ 대삼마을에는 파밭등이라고 있는데, 보림사를 창건할 때 인부들 반찬용으로 파를 키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용문리가 사학의 다리부락이었어요. 대삼, 내삼, 신삼, 의신 이렇게 저그 갈림길에다 사학의 다리부락이 형성되어갖고 있었어요. 옛날에는 여기를 삼실이라고 했는디 그 후로 마을명을 바꿔가지고 큰 [대]자 석 [삼]자 대삼이라고 썼는 갑디다. 그렇게 명칭을 했는갑디다. 여기가 한 전부해서 60호 정도 형성되어 있었거든요. 근디 6·25 후로 피난 다녀가지고 이후로 나와가지고 다 도시로 모두 가버리고 인자 이 위에 마을도 철거 되야불고 저기 신삼도 철거 되야불고 그래서 인자 몇 집씩밖에 없으니까 철거를 시켜부렀지요. 그렇게 된 사실이고. 원래 인자 여기가 ‘파밭등’이거..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용문의 노송천제 (老松天祭)

용문의 노송천제 (老松天祭) ▶ 마을 강가에 노송이 있었는데, 도벌꾼이 노송을 뿌리째 파 간 후 마을에 질병이 창궐하는 등 재앙이 많았다. 이후 주민들이 노송천제를 올려 재앙을 방비했다. 노송천제 풍속은 한국전쟁 이후로 사라졌다. 마을에서 천제를 모셨거든요. 그래서 어째서 천제를 모셨나믄 정월보름날 천제를 모시는니, 요만한 동글동글한 바위에 나무가 나갖고 있는디 그 밑에가 해년마다 대로 말뚝을 해가지고 와상같이 만들어서 거기다 제물을 올려놓고 보름날 닭이 울면 제사를 모셔요. 정월보름날이믄 대나무, 가지나무, 고추대를 피워놓고 액막이를 한다고 해서 했는디 천제 모시는 데서 제사를 모시면은 소리가 나면 그 후에 각 부락에서 또 모셔요. 왜 천제를 모셨는가 하믄 그 옆에 가믄은 이렇게 산 바로 바로 위엔디 ..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용문의 용소와 피재

용문의 용소와 피재 ▶ 보림사 창건 설화의 변형된 형태로, 보림사터가 원래는 소였는데 도사가 소를 메우기 위해 사람들에게 눈병을 퍼뜨린 후 소에 돌은 넣으면 눈병이 나은다는 소문을 내 사람들이 소에 돌을 넣게 했다. 그 과정에서 소에 살던 용이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며 재를 넘어 장평면으로 가면서 꼬리로 산을 내리쳐 계곡이 되고 그곳에 소가 생겼다. 그래서 그 소를 용소라 하고 그 재를 피재라 한다. 절에 아주 전적으로 일생을 바치듯이 한분이 있어요. 모든 사찰을 지을 때에 3천년 역사라고 저도 듣는 풍월이지만은 쏘였다 하대요. 쏘를 메켜가지고 절을 만들었거든요. 소를 어떻게 메켰느냐면 도사님이 전국에다가 국민들한테 눈에티로를 줘붕께 그것이 옛날에는 참 힘든 일이거든요. 거기다가 돌을 한 돌멩이 던지면 ..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말정거장이라 마정마을

말정거장이라 마정마을 ▶ 마정마을은 과거에 말들이 쉬어가는 말정거장이었다. 그래서 마정마을인데, 산골이라 농토가 좁았다. 당시에는 마부들을 위한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들어본 얘기로, 조양 그쪽으로 고을 원님들이 거주하고 우리 마을은 행정적으로 일보러 온 사람들이 말을 몰고 와서 멈춰놓고 일보고 다시 움직이는 장소라 해서 말정거장, 그래서 마정마을이라고 한 것 같애. - (그런 흔적이 남아있어요?) 없제. - (주막거리였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그 말을 멈추면 쉬어야하니까. - (마을의 장터라는 것도 꽤 크게 열렸을 것 같은데) 그 소리는 못들었어요. 마부들이 술 한 잔 하고 갈수 있는 주막거리 정도. - (마을이 부유했겠어요?) 여기는 유치면에서도 지금은 좀 낫지만은 가난한 동네였어..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산속에 널린 게 시신이었다

산속에 널린 게 시신이었다 ▶ 한국전쟁 막바지에 마을 인근 산속으로 빨치산들이 몰려들어 결전이 일어 났는데, 산에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그 뼈를 그냥 주워가기도 하고 마을의 어린 아이들은 버려진 실탄을 가지고 놀다가 사고가 나기도 했다. 6·25전쟁 때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어요. 빨갱이들은 몰려있고 경찰들은 잡으러 다니고. 저그 산에가 순전히 시신이 징했다고 해. 널려 있는 게 뼈대였다고 해. 산속이 깊으니까 - (그거를 발굴하고 했나요?) 발굴한 것이 아니라 그 후로 그냥 주워가부렀다고 하대. 시신 뼈대를 다 주워갔대. - (누가요?) 모르제. 땅에 묻혀있었던 실탄도 다 주워갔대. - (실탄이 땅속에서 나왔어요? 지금도 있겠네요.) 그때 그 뒤로도 한 번 수거하느라고 검사 다닌 거..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보림사 채공이 거지도사가 된 사연

보림사 채공이 거지도사가 된 사연 ▶ 보림사에 채공 일을 하던 수원이라는 무식한 사람이 있었는데, 스님의 지시로 300일 기도 끝에 땅속을 들어다 보는 도사가 되었으나, 정작 자신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300일 기도가 헛수고였다고 스님을 원망했다. 기도가 끝나자마자 개고기와 막걸리를 먹고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땅속이 들어다 보였다. 그러나 이미 얼굴에 나병 같은 것이 생겨 절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평생 거지도사로 떠돌며 남들 묘자리를 봐주며 문전취식으로 살았다. 제가 어른시절에 어른들한테 자주 들어본 얘긴데, 보림사에 채공 일을 하고 계신분이 계셨다고 해요. 채공이 뭣인고 하믄 절에서 나무 담당하는 직책을 가진 분이에요. 못 배우고 그래놔서 나무나 하는 사람을 옛날에 채공이라고 한다고 해요. 채공하신..

유치면 2017.11.07

[유치면] 면소재지가 들어서면서 되살아난 원님고을 원등

면소재지가 들어서면서 되살아난 원님고을 원등 ▶ 원등이란 곳에 원님이 살았다고 구전되어 왔는데, 유치면 사무소를 이곳에 이전하면서 사라진 원등마을이 그 이름을 되찾았다. 그때가 인제 2000년이 좀 되기 전, 그때 자응 국회의원이 김옥두 의원일 겁니다. 군수님이 김재종 군수님 그라고 유치면장님이 문상배씨고. 그런 과정에서 댐이 되니까 유치면 소재지를, 아마 자응군이 생긴 이후로 면소재지를 옮긴 것은 그때가 처음 일이고 앞으로 그런 일은 드물지 않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면소재지를 옮기는 데는 우선 면민들이 합당한 장소를 정해야 되는데 그것이 인자 전쟁이 치열했어요. 당초 장흥 군수님이나 장흥군의회에서 생각하기는 암천에다가 면소재지를 옮길라고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그려냐면 그쪽에가 상수원하고 거..

유치면 2017.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