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51

[의향편] 임진왜란 때 위대기 장군이 돌아가시자 투구와 갑옷을 물고 고향마을로 돌아온 말

임진왜란 때 위대기 장군이 돌아가시자 투구와 갑옷을 물고 고향마을로 돌아온 말 ▶ 임진왜란 때 위대기 장군과 팔 형제가 싸우다 돌아가셨다. 위대기 장군이 돌아가시자 말은 투구와 갑옷을 가지고 장흥 고향마을로 돌아온다. 지금도 철모가 남아있다. 그 분들 거 임진란에 모도 나가서 싸우다가 돌아가신 양반들이 팔 종앙가 있는데 그분들 묘소가 지금 평화 2구에가 있는데. 누가 누군지를 몰라, 우리도 지금. 저거이 없어 시신이 없는 묘여 모도. 그랑께 인자 저 시신을 찾은 분은 거가 있고. 그런데 하도 오래 돼가지고 그 묘를 팔 종앙간, 그라닌까 저 팔 형제들 묘란 말이여. 그란데 거기가 누구 누구 누구 인자 저것은 있는데, 우리한테 기록은 있는데 무덤이 없다 그 말이여. 누군지를 몰라. - (위대기 장군이 돌아가..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임진왜란 때 왜구와 싸우다 돌아가신 초계 변씨 13총

임진왜란 때 왜구와 싸우다 돌아가신 초계 변씨 13총 ▶ 이순신 어머니가 초계 변씨였다. 외가 사람이라 하여 초계 변씨 삼형제를 포함한 여러 가족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그래서 나라에서 배산을 하사하여 초계 변씨 13총 묫을 썼다. 거가 처음에는 거가, 내가 초등학교를 용산서 다녔거든. 용산서 다녔는디 내가 외가집이 용산이었어. 내가 처음에 이집이 우리 마을에서는 제일 오래된 집이 요거여. 그란디 내가 앞만 고쳤지 머리는 그대로 놔뒀어. 나로 하먼은 증조부님, 증조부님이 여, 건축을 했거든. 저 건네 우리 산이 배산이라 한디, 당암리 배산이라 한디. 거가 정예군 묘지, 변씨들. 정예군 묘 초계 변씨 13총. 속은 열다섯 양반인디 두 냥반은 쩌어 경상도로 갔고, 열세 냥반이 15총이여. 열세 냥..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조선의 제갈량 풍암 문위세

조선의 제갈량 풍암 문위세 ▶ 풍암 문위세는 어려서는 퇴계 이황의 문하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37세부터 장흥에 거주하면서 도학에 관심을 갖고 후학을 양성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풍암은 59세의 나이에 형제들과 함께 7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보성과 순천, 남원, 무주, 금산, 성주 등지에서 왜적을 맞아 큰 공을 세웠다. 특히 퇴계에게 배운 팔진도 병법은 조선의 제갈량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였다. 이 같은 공을 인정받아 호남 을량사, 용담 현령, 파주 목사로 임명 받고 병조참판으로 증정되어 공신록에 기록되고 있다. 풍암공 문위세의 12대 손입니다. 풍암 문위세는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군을 모집해서 저 멀리 경상도 성주 회복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국가에서 인정받아 호남 을량사, 용담 현령, 파주 목사로 임..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임진왜란 의병 문기방과 그의 의마

임진왜란 의병 문기방과 그의 의마 ▶ 문기방은 문위세와 숙질간으로 의향 장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문기방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율장군 휘하의 의병이 되었다. 진주성과 금산산성에서 고진분투하였고 정유재란 중 남원성에서 최후를 맞았다. 남원성 전투에서 문기방이 성문을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문을 붙들고 버티자 왜군이 그의 손목을 절단냈다고 한다. 최후 전투를 앞두고 피로 유서를 남겼는데, 그의 말이 그의 칼과 혈서를 물고 고향으로 와 전했다고 한다. 현재 그의 묘와 함께 말의 무덤도 만들어 기리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충신이 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임진왜란 당시에, 장흥의 향토사를 본다면, 의향의 고향이여.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이런 난이 있었을 때..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귀양 간 천관산

귀양 간 천관산 ▶ 천관산이 이씨조선이 들어선 이래 고흥의 옛이름인 흥양으로 귀양을 갔다는 이야기다. 관산은 고려 때 주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조가 성립되면서 새 왕조에 불만을 품고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흥양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귀양이라는 것은 고려시대, 또 고려조 때, 뭐 조선조 때 행해지던 형벌 중의 형벌인데. 옛날에는 방축향리다, 하는 정도로 형을 한 거여. 말하자면 죄를 지으면 벼슬을 띠고, 어느 지역 일정 장소의 바운다리 안에서만 거주하도록 그런 것이 가벼운 형을 했는데, 훗날 도배, 뭐 유배 뭐 이런 형식으로 먼 곳으로, 그 원지에다가 보내면서 최소한도의 지역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도록, 이렇게 좀 강화된 것이 유배형인데, 우리 천관산을 흥양 천관산으로, 흥양으로 ..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문림편]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학생 송기숙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학생 송기숙 ▶ 송기숙의 집안은 아주 가난했는데 온 식구가 대나무와 볏짚, 쌀장사를 해서 기숙을 학교에 보냈다. 기숙은 항상 손에 책을 들고 다닐 정도로 학구파였다. 송기숙씨가 여그서 나랑 같이 학교를 댕기면서 인자 그 문학의 소질이 있어서 공부를 해가지고. 그래도 이 부락에서는 송기숙이가 그래도 학교댕긴 것으로는 최고로 낫지, 낫고. 이 부락을 자주 왔었어. 그라고 자기가 태어난 부락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원래 자기가 태어난 부락은 완도 금일면이거든 거가. 그래서 약 한 4살인가 5살 묵었을 때 여그를 왔어. 그래가지고 초등학교 때부터 계산국민학교를 댕긴디. 학교, 국민학교는 나하고 3년 선배여. 그라고 중고등학교도 나보덤 3년 선배고. 인자 여그를 같이 넘어 댕기고. 인자 ..

문림의향 특집 2017.09.08

[문림편] 소설가 이청준

소설가 이청준 ▶ 장흥 회진 진목리 출신의 소설가 이청준이 어린시절 겪은 잇다른 가족의 죽음과 가난에 대한 이야기. 진목교회 야학, 진목동초, 광주서중, 광주일고, 서울대 독문학과를 다니며 성장한 작가의 젊은 생애를 사실적으로 구술해줬다. 집안의 어려운 환경을 문학으로 그려낸 작가의 생애를 실제 사례들을 들어 구술했다. 이청준 선생은 원래 지금 묘소가 있는 갓마을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아래쪽 마을, 거기서 태어납니다. 거기서 태어나가지고 사는데, 총 해서 아버지 어머니, 형 둘, 이청준 해서 8가족이 살아요. 6남맵니다. 형이 둘 있었어요. 큰형이 그때 18살 정도 됐을 무렵 이청준 선생 나이로는 6살 정도 됐을 때 무렵에 큰형이 몸이 계속 아팠어요. 아팠고, 큰형한테 다락방이 하나 있었다더라고요. 그래..

문림의향 특집 2017.09.08

[문림편] 소설 「선학동나그네」에서 비롯된 선학동 마을

소설 「선학동나그네」에서 비롯된 선학동 마을 ▶ 회진의 선학동마을은 ‘큰산밑에’ → ‘산저(山低)’라는 마을 명을 거쳐 2011년에 ‘선학동마을’로 개명되었는데,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소설 「선학동 나그네」에서 연유하였다. 선학동마을에는 구술바위, 종맷재, 선돌 등과 같은 법승과 연관된 지명이 많은데, 이에 관한 내용이 소설에도 함축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우리 마을이 ‘선학동’이라고 이렇게 개명을 했습니다. 그 전에는 ‘큰산밑에’. 참 좋은, 좋은 이름이잖아요, ‘큰산 밑에’. 거기를 인제 마을 명칭 변경, 옛날에 어르신들 하면서 ‘산아랫마을’ 해서 ‘산저(山低)’. 큰산밑에도 우리 마을로 엄청나게 좋은 이름이잖아요, 큰산밑에. 그거를 한자풀이로 산저라고 했어요. 그러다가 2011년 10월달에 이청준 선..

문림의향 특집 2017.09.08

[문림편] 문학병이 든 고등학교 시절과 억불교지

문학병이 든 고등학교 시절과 억불교지 ▶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따라 문예반에 들었다. 문예반에는 1년 선배 송기숙이 있었고 우리는 글을 쓰고 편집하여 교지 『억불』을 창간했다. 그리고 옆집 여학생에게 날마다 책을 빌려보며 문학병이 들었다. 내가 2학년 되든 해에, 2학년 초 되든 해에 특활이 처음 생겼어, 우리 교육사상. 근께 그 해에 특별활동이라고 하는 것이 처음 생겼어. 그래가지고 어 인제 그 금요일 네 시간 오전에는 하고, 오후에 5시간 6시간. 5교시 6교시를 특활이라고 해가지고 활동을 해. 전부다 다 자기 가고 싶은 데로 가고 그랬지. 그랬는데 나는 그때 회진에 사는 내 친구가, 그 친구는 나보다 훨씬 더 문학을 빨리 했지. 문학을 빨리 했는데, 근께 문예부가 뭔가 문예가 뭔지를 알았어. 나..

문림의향 특집 2017.09.08

[문림편] 회진팔경(會鎭八景)

회진팔경(會鎭八景) ▶ 2016년 현재 50대 중반인 구술자가 30살 무렵, 부락의 한 어르신으로부터 우연히 건네받은 「회진팔경」. 이 글은 예전에 객사터에 있던 서당의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급제한 글이라고 전해진다. 지금은 이 「회진팔경」에서 언급한 풍경이 많이 사라져버렸으나 회진의 옛적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저는 경주 이씨 백사공파 12대손 이제석인데요. 우리 보명으로는 그냥 제우라고 해요. 한자 복자 할아버님의 5대손인 경자 효자 할아버님이 아마 회진으로 오셔가지고 우리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그 후손들이 이렇게 다 자리를 잡아가지고 지금까지 쭉 해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거기에 인자 경자 효자 할아버님으로부터 7대 후손인, 저희 아버님은 매자 용자인데요. 우리 족보상은 종자 돌..

문림의향 특집 2017.09.08

[문림편] 관산의 서당

관산의 서당 ▶ 관산읍 각 지역에 있었던 서당, 서실들에 대한 이야기. 구술자가 전해 들은 이야기로 각 지역 서당, 서실, 재각 등의 내력을 설명하고 재각기 그곳에서 강학소의 형태로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이뤄졌다는 것과, 자신의 학습경험을 사실적으로 구술한 이야기다. 관산읍에서 옛날에 운영된 그, 서당, 강학소를 인자 한번 이야기 할라고 그래. 어느 동네가 있었는가 이거. 우리 읍의 서당의 역사는 문헌이 없기 때문에 오래 전에부터 이어져 왔겠제마는, 문헌에 나타나기는 1938년도, 《장흥지》를 하면서 비로소 인자 읍면에 서당 현황이 파악 된 거여 인자, 그래서 인자 처음으로 기록된 것이 1938년 《장흥지》에 기록된 내용인데, 건물을 갖춰 갖고 강학소로 이렇게 따악 있는 곳은 몇군데 안되고, 마..

문림의향 특집 2017.09.08

[문림편] 고산향약계

고산향약계 ▶ 관산읍의 이전 행정명인 고산(관산의 옛지방) 향약계에 관한 이야기. 1867년에 창계한 향약계의 구성 마을명, 규약, 세칙사항 들을 담고 있다. 이후 고산면이 고하면으로 분리되면서 14마을이 빠져나가서 따로 향약을 만들게 되었으나 이는 도중에 없어지고 고산향약계만 현재까지 70여 명의 계원들로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고산향약계는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창계돼 갖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계인데, 우리 고산향약계는 1867년 고종 4년에 27개 마을이 70냥 6전을 갹출해가지고 돈을 모금해가지고 창계를 하면서 절목을 그때 만들었는데, 절목이라는 것은 요새 말하자면 계칙, 계 회칙이제이? 약규를 만든 거여. 이때 참여한 마을이 있어. 그것이 중요하다고 봐. 지금 우리가 모르는 마을..

문림의향 특집 2017.09.07

[문림편] 장흥위씨 판서공파 종택과 종가이야기 2

장흥위씨 판서공파 종택과 종가이야기 2 ▶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창고 등 모두 8가옥으로 구성된 장흥 위씨 판서공파의 종택은 2004년에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이 집에는 400년 된 천릉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위치도 좋아서 방촌의 들과 23번 국도가 훤히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서적과 철피리와 옥피리, 영여 등 각종 유물과 유품이 소장되어 있기도 한 곳이다. 시방 개수를 하니라고 집을 뜯었다 다시 지었는디 나는 그전에, 과거 그전에 있던 그 집에서 내가 출생을 했어요. 그 집이 어떻게 되었냐, 그 집이 디귿자 집이여, 디귿자 집. 그라고 사랑채가 앞으로 딱 막고 있기 때문에 딱 집이 입 구(口)자. 안 그라믄 대문만 닫쳐 불면 밖에 영 사람이 아이고 못 들어 그렇게 집이 ..

문림의향 특집 2017.09.07

[문림편] 장흥위씨 판서공파 종택과 종가이야기 1

장흥위씨 판서공파 종택과 종가이야기 1 ▶ 관산읍 방촌마을에 자리 잡은 장흥 위씨 판서공파 종택은 1623년에 지어졌다. 14대를 이어온 종가로, 모두 여덟 채의 가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려시대 때에는 동헌 터였다. 파명은 조선 선조 때 가문이 호조판서 벼슬자리에 오르면서 ‘판서공파’가 되었다. 이후 주로 무과 쪽에서 많은 후손들이 활약을 해왔다. 또 호남의 3대 실학자로 불리는 존재 위백규 선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장흥 위씨 판서공파 종택은 방촌리 내동마을 492번지에 위치를 하고 있는데 이 터는 동헌 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 동헌 터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전라남도 민속자료 38호로 86년도 2월 7일날 지정이 됐어요, 이 가옥에 대해서. 그전에는 위성렬 가옥, 종..

문림의향 특집 2017.09.07

[문림편] 무기계의 유래와 역할

무기계의 유래와 역할 ▶ 방촌마을에는 무기계(無忌契)라 부르는 계가 조직되어 있다. 이는 이름 그대로 ‘시기나 질투 같은 다툼이 없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존재 위백규 선생이 창계한 것이다. 이 무기계를 통해 마을 사람들은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 매년 음력 2월이면 풍년을 기원하며 마을의 액운을 없애기 위한 천관 산신제를 지낸다. 무기계(無忌契)는, 이 마을의 무기계라는, 무자는 없을 무자하고 기자는 다툴 기자예요. 그래서 다툼이 없이, 왜 그냐면 이게 어느 때 만들어졌냐 하면 존재 위백규 선생이 한 6~70 정도 나이 때 만들어진 것 같아요. 만들어졌는데, 아마 그때 당시에도 그 일테면 이 그,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그런 게 있잖아요, 시기하고 질투. 인제 그런 걸 없애는 마을, 그런 그런 것이 없는 ..

문림의향 특집 2017.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