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문림의향 특집 51

[의향편] 석대들전투 패전 후 피신한 부용사에서 살아 돌아온 동학농민군 이겸호

석대들전투 패전 후 피신한 부용사에서 살아 돌아온 동학농민군 이겸호 ▶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조부님은 장흥석대들전투 패배후 용산 부용사로 피신하셨다. 이를 알고 잡으로 온 관군들에게 그 속에 숨어있던 모든 농민군이 사살되었으나, 조부님만은 스님의 변호로 무사히 살아 돌아오셨다. 내가 듣기로는 먼저 형님이 우리 동학 나댕기셨고, 조부님이 우째 동학에 참전을 하셨냐 그라며는. 큰 조부님은, 형제분이신디, 큰 조부님은 면에 출입을 하시고 우리 조부님은 시골에서 살림하시면서 농사짓고. 그랬는디 형님을 살리기 위해서 조부님이 동학에 투신을 했다 그러시더라고. 그렇게 얘기를 들었고 인제 그러니까 동학에 참전을 하셔가지고 1894년 12월 24일날 저녁에 여기 어서마을에서 간부급들이 회의를 하셨다고 하더라고. 그래가..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장흥동학농민혁명 석대들전투에서 숨진 조부님

장흥동학농민혁명 석대들전투에서 숨진 조부님 ▶ 동학농민혁명 당시 강진에 다녀온다고 조부님이 책을 들고 나가셨다. 하지만 석대들전투 패배 후 자울재에 수 100명의 농민군 시신이 있다고 해서 조모님이 찾으러 갔으나 찾을 수 없었다. 농민군들을 유지기를 씌워 불에 태워 죽였기 때문에 시신을 구분할 수 없었다. 나 19살 묵어서 조모님이 돌아가셨단 말이요. 그 죽산 안(安) 씬데 저 척산 앞에 열녀비, 열녀비 비석을 내가 세왔거든. 그 함머니 말에 의한다 하면은 음 책을 갖고 나가. 그래서 함머니가 “어디 가시냐”고 그라닌까, “강진 좀 다녀온다”고. 어 “언제 오시냐”고 그라니까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그라고 나가셨어. 그래갖고 석대전투에, 지금 우리가 생각컨데 장흥 석대전투에 참전해갖고 자올재에서 수 1..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장흥농민군이 이제사 빛을 보게 되었다

장흥농민군이 이제사 빛을 보게 되었다 ▶ 1894년, 호남 지역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자주화 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역사다. 당시 전라도에는 53개의 집강소가 있었는데 그 중 두 개가 장흥에 있었으며 3만 명이나 되는 농민군들이 전라도 각지에서 장흥으로 모여들어 외세에 맞섰다. 장흥 지역의 이방언 장군, 이백호 선생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들을 이끌며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장흥이라는 지역과 장흥 지역 농민군들의 혁명 활동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이제라도 동학농민혁명과 당시의 장흥이 조금씩 재조명이 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한문으로 돼 있는데 장흥 농민은 전연 빠져 있더라고. 무장 기포에서 실패해가..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소년뱃사공

소년뱃사공 ▶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1894년 11월, 장흥 석대들에서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곳에서 패한 동학군들이 자울재를 넘어 회진쪽으로 와 당시 섬이었던 덕도로 숨어들었다. 당시 작은 섬이었던 그곳은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로 패퇴한 5~600명 동학군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이 15세의 소년뱃사공, 윤성도가 숨어있던 동학군들을 밤 어둠을 틈 타, 1~20명씩 인근 고금, 약산, 금일, 금당 등 가까운 인근 섬으로 모두 피신시켜서 단 한명도 죽은 이가 없게 했다는 이야기다. 할아버지 성함은 윤자 성자 도, 호적상 그렇게도 불렀고, 우리 부락에서는 윤자 성자 범자로, 이렇게도 불렀고, 우리 족보상에는 윤자 성자 호자로, 이렇게 이름이 3개로 불러왔어요. 할..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동학혁명농민군 명사수 박갑수

동학혁명농민군 명사수 박갑수 ▶ 동학농민군이 전북 고부를 점령할 때 부산면 효자리 박갑수라는 대장장이가 큰 공을 세웠다. 박씨는 대장장이 시절 스스로 총을 만들어 나는 새를 맞출 정도로 명사수였는데, 전북 고부를 점령 할 때 동학군 명사수로 활약했다. 동학군이 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곳곳에 자수하라는 방이 붙을 정도였다. 박씨는 동학군이 패하자 유치면 처가에 피신해 있다가 결국 자신의 총으로 자결했다. 동학 얘기는 내가 말 안하더라도 온 국민이 다 아는데, 실제는 우리 한국을 망친 원인이 그때 일어난 거예요. 중앙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군대도 없애 버리고 군인에게 갈 봉급과 식량을 모두 벼슬아치들이 가로채분 거예요. 또 그 당시에 대원군이 집정을 해서 일부 불타 없어진 경복궁을 다시 중설을 하려다 ..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석대들전투에서 전사한 한문선생

석대들전투에서 전사한 한문선생 ▶ 동학농민혁명 당시 용반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동학군에 참여하거나 그들을 도왔는데, 구술자의 증조 할아버지는 용산에서 한문 선생을 하다 석대들 전투에 나섰다가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조부님은 당시 용반마을 동장을 지냈는데 일본군에게 고문을 당해 큰 고초를 겪었다. 현 이장 6대 조부인 이사경 어르신이 동학 접주 어르신인디, 집안에서 이천 이가가 태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디, 그 양반이 접주를 하시니까 밑에서 안 도울 수 없었어. 근디 반면에 한 일가 집안의 한 분이 일본사람의 스파이 노릇을 해. 여기서 동학 행세를 일본사람한테다 다 까바치고 하는 양반이 있었어. 그 분 무서워서 갑오 동학 활약한 양반들이 기억산 똘밭에서 밤낮 생활을 하듯이 해. 그러꿈 애로가 있시 산디, 저..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이름없는 동학농민혁명군의 대님

이름없는 동학농민혁명군의 대님 ▶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군의 전라남도 본부가 병영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많은 동학군이 희생되었다. 이름 없는 농민군의 시신이 쌓여 있었으나 훼손이 심해 가족들조차 알아 볼 수 없었는데 부인이나 며느리가 각자의 솜씨로 지은 옷가지 특히 발목을 묶은 대님을 보고 시신을 구분하고 제 식구를 찾았다. 내 외가가 바로 이 동네 용반마을인디 최씨 집안이여. 외가의 증조부님 그랑께 내 어머니의 할아버지가 동학군에 참여를 했어. 관군 전남 본부가 병영이여. 동학군이 병영으로 정부군 습격을 갔어. 증조부님이 같이 습격을 갔제. 인자 거그 병영서 전사를 당했어. 오랫동안 못 가고 있다가 외할머니가 시체를 찾으러 갔제. 갔는디 시체들을 찾았는디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어. 사람은 겁나 많이 죽..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이사경 동학농민혁명군 접주의 최후

이사경 동학농민혁명군 접주의 최후 ▶ 이사경 접주가 일본군에 밀려 고향인 용반마을로 숨었는데, 유치에서 고용살이 온 강씨가 이를 밀고해 접주는 사형을 당하고 마을은 소각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더러는 사형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 당했다. 관군 후손 길씨는 동학에 참여한 농민의 집터를 빼앗아 그 곳에 묘를 썼는데 현재까지 그 묘가 마을 한가운데 서 있다. 주민들은 묘를 이장하고 터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이 마을가 동학농민혁명군 접주가 살고 있었어. 이사경씨라는 접주인디 지금 이장님 증조부님이여. 그분이 접주로 있었기 때문에 우리 마을이 상당히 동학군에 참여를 많이 했제. 인자 그래갖고 동학난을 겪은 과정에서 동학군이 일본군이 개입해 갖고 몰린 판이여. 패전할 판이여. 그 무렵에 접주가 도망갈 데가 ..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농민군 탈옥시킨 청년장사 이몽근

농민군 탈옥시킨 청년장사 이몽근 ▶ 동학농민혁명 당시 용반마을에 힘이 장사인 이몽근이라는 청년이 살았는데 자신의 가족들이 병영 관청에 잡혀 있음을 알고 방망이로 감옥을 부수고 갇힌 농민군들을 탈옥시켰다. 우리 마을에 이몽근 이라는 양반이 있었는데 그 양반이 아주 거인이래요. 힘도 좋고 생긴 것도. 한두 사람 같은 것은 한판잽이도 못된대요. 그 양반이 자기 일가들이 병영 관에가 많이 잡혀 있으니까 밤에 찾아가 수의를 둘인가 셋인가를 방맹이로 때려 없애 버리고 문짝을 때려 부셔 버렸어. 그래서 다 내빼부렀어. 거기 있던 사람들이. 인자 여기 와서 자기 집에서 살지는 안 하고, 동학에 가담한 양반들이라, 자기 의무하고 돌아 댕기니라고 갔제. 여기 와서는 못 있어요. 일본놈들이 잡아 강께. - [당시 나이가 1..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민란의 두목이 된 보성군수, 고제량

민란의 두목이 된 보성군수, 고제량 ▶ 조선시대 철종 때 보성군수 고제량은 한해가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자 부자 양반들에게 곡식을 빼앗아 나눠준다. 하지만 그래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켜 고제량을 두목으로 추대한다. 저 집은 인자 물론 300년 전에 왔으니까 300년 전에 집을 짓고 살았죠. 살았는데 무산 할아버지라고 있습니다. 고제량이라고. 그 할아버지께서 인자 보성군수를 했어요. 보성군수를 할 때 그때 한해가 들어가지고 보성, 장흥 요쪽으로 전부 한해가 들어가지고 아주 백성들이 굶어 죽으니까. 그때 당시 시골에 인자 그 양반님네들, 그 분들을 데려다가 좀 내놔라, 그래가꼬 전부 구휼을 해야쓸 것 아니냐, 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원체 세도들이 쎄니까 그 보성 안씨들로 해서 그 세도..

문림의향 특집 2017.09.12

[의향편] 임진왜란 고경명, 한말 항일의병 고광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고영완

임진왜란 고경명, 한말 항일의병 고광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고영완 ▶ 고경명 장군은 임진왜란 때 3부자가 왜와 싸우다 순절했다. 고광순은 한말에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웠다. 고영환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그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 그 할아버지께서는 60세에 밀양부사를 하셨어요. 그래가꼬 그만두고 여기를 오셨는데 광주죠, 지금 잉. 거그 막 오셨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그때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자기 큰아들 종자 후자 그분하고 둘째아들 임자 후자 그분 세 분이서 인자 임란에 참여를 했는데. 막둥이인 용자 후자 할아버지가 있어요. 막둥이. 거가 여섯째였는데 거기서 그때 당시 14살이였는데 “나 따라 갈란다” 말고삐를 잡고 따라갈란다, 한께 “너라도 남아 있어야..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정유재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각왜동(却倭洞) 김응원

정유재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각왜동(却倭洞) 김응원 ▶ 정유재란 시 마을에 살던 김응원이 강진까지 쳐들어온 왜군을 골짜기 나무마다 등을 달아 군진지로 속여 물리쳤다. 그래서 그 골짜기 마을을 각왜동(却倭洞)이라 부른다. 또 그러고 인자 한 가지 유명한 게 머냐며는 각왜동이라고 각왜동. 왜정 거시기 임진왜란하고 정유재란 때, 정유재란 때 그랬다고 한 것 같어. 거시기 정유재란이라고 그랬던 것 같더라고. 이 위에 골짜기가[동네 안쪽을 가리키며] 동네 있었드만이요. 그때는 인자 야지로 안 나오고 골짜기에서 주로 집을 짓고 살았던가. 그래 가꼬 그때 집이 어딘가 그전에 황씨들이 살았던 집인가 모른디 저 어딘가 저쪽 강진 땅으로 해서 그게 기왓장이 요렇게 뚜꺼운 기왓장이 많이 출토되고 그랬어. 지금도 저기 묻힌 ..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이순신 장군이 회령진성 객사터에서 주무시지 않았을까?

이순신 장군이 회령진성 객사터에서 주무시지 않았을까? ▶ 회령진성에 남아 있는 객사 터. 객사란 조선시대 때 왕의 위패를 모셔놓고 한 달에 두 번,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곳으로, 사신이나 중요한 나라의 손님이 묵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도 명량대첩 당시 회진의 이 객사에 머물며 거북선도 정비하고 군량미도 확보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객사 터란 회진서 어렸을 때부터 객사 터, 객사 터라고 그런 지명을 우리가 듣고 자라왔는데 바로 [객사 터를 가리키며] 여기가 객사 터 자리입니다, 여기가. 이 성터 있고, 이 성 안에 있던 자리가 바로 객사 터 자리인데 왜 여길 객사 터라고 했는 것인가? 도대체 객사라고 하는 곳이 뭣인가? 그래서 상당히 궁금해하고 살아왔어요, 뭐. 그런데 객사 터에 대해서 어..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회령진성

회령진성 ▶ 회진성은 1490년 보성 군항리에 쌓았던 것을 회진성의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완도 고금도와 이진성 등이 위치한 이곳으로 옮겨서 1554년에 쌓았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전해 들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명확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것을 분명히 했으면 하는 의견을 말했고, 회진성을 쌓았을 당시에 이곳 회진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생활상도 얘기했다. 더불어 인근 섬마을의 묘터와 장산리 형국을 뱀 형국에서 게 형국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도로 가는 육교를 게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회진에 수군만호가 주둔하면서, 회진성이 성종 제9대 임금이신 성종 21년, 1490년에 회령진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보성 군항리에 있었거든요. 그 다음에 64년 가차이 거가 있다가 회령진을 설치한 이유는 마량과..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선조가 김여중에게 부여한 마을이름, 금곡

선조가 김여중에게 부여한 마을이름, 금곡 ▶ 임진왜란 때 김여중은 백미 300석을 군량미로 내놓는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김여중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으나 벼슬을 사양한다. 선조는 중국 진나라 부자 석순이 살았던 금곡을 마을 이름으로 하사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 마을에가 출중한 어르신들이 숱하게 많이 나오셨어. 에 그때는 공신록이 선무야. 그렇잖소 인자 임진왜란이 선뭅니다. 여기서 선무도 나오셨고 그 여러 훌륭한 어르신들이 나왔는데, 그 진사 벼슬까지 당시에 하셨던 김여중 이시라는 양반이. 그 양반 호가 헌헌이여. 헌헌 김여중이라는 어르신이 나서가지고 모곡 운동을 한 거여, 모곡. 아 전쟁이 벌어졌으니까 군량미를 어떠케 준비를 해야제. 누가 군량미를, 느그가 만들어 달라 해서 한 게 아니고 인자 이 어르..

문림의향 특집 2017.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