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안양면 29

[안양면] 물이 귀해 여자들이 밤새 샘물을 기르느라 가족계획이 필요 없던 마을

물이 귀해 여자들이 밤새 샘물을 기르느라 가족계획이 필요 없던 마을 ▶ 우리 마을은 옛날부터 물이 귀했다. 그래서 양사마을 앞에 들물을 먹고 여자들이 메구 치고 올라가 무등등 샘에서 기수굿을 드렸다. 여자들이 밤새 통샘에서 물을 기르느라 애 만들 시간이 없어 군사정권 시절 가족계획(둘만 낳아 잘 기르자)도 필요 없었다. 물이 없어 우리 마을이. 마을이 물이 없어 가지고 샘을 파는데 동재가 상댕이 없어졌어. 물, 물 먹을라고 인자 샘을 파잖아, 인력으로. 그때는 기계가 없응께. 그란께 인건비 주고, 인건비 주고 그래갖고 동재가 바닥이 나다시피 해부렀거등. 동네 돈이. 그래가지고 가만 있어, 저 샘을 몇 년도에 팠다냐, 회관에. 그래가지고 물을 어서 길러다 묵냐면 들샘, 인자 잉 들에 농사 질라고, 그때는 ..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동학혁명 때 모래기라 불리며 큰 피해를 입은 모령

동학혁명 때 모래기라 불리며 큰 피해를 입은 모령 ▶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는 관군이 미륵댕이 주막에서 모령을 찾으려고 물으니 수양 밑에 마을이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관군이 잘못알고 수양 아래 조그만 마을인 하양으로 쳐들어가 마을주민들 다수를 학살했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모령마을 사람들도 다수 희생을 당했다. 동학 때 우리 마을이 어뜨게 해서 피해를 봤냐면은 그 인자 우리 마을을 칠라고 왔어. 오다가 미륵덩이라고 있거든. 장흥하고 안양하고 경계에 미륵덩이 있제, 기산 그 옆에. 거기 와서 주막에 와가지고 모령이라는, 그란께 그때는 동학 때는 모래기락 했어. 모래기가 어디냐 그란께 수양 밑에가 모래기라 그러니까. 수양 밑에가 하양이라는 데가 있죠, 거 쪼그만한 마을 여그 여 저 사장나무 있고. 그 동네가..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임금산 제암산(帝岩山), 임금 스승이 나는 사제산(師帝山)

임금산 제암산(帝岩山), 임금 스승이 나는 사제산(師帝山) ▶ 제암산은 임금 제 자를 쓰는 전국 유일 산이고 사제산은 임금의 스승이 나올 산이다. 사자산은 인제 하기야 조선 명종 때부터 사자산이라고 기록이 되어 오는 거 보니까 조선시대부터 사자산이라고 한 것 같은데 일선에 의하면 사제산이었다, 그래요. 사제산. 우리 제암산은 임금 제(帝)자를 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산이 제암산이잖아요. 그라면 동천 쪽에서 보면은 병풍, 어병산이고 우리 기산 쪽에서 보면은 고려시대에 사제산이었다, 임금의 스승이 나올 산, 사제산. 그런데 명나라 시대에 와가지고 사자 형국이 됐다 해서 조선시대에 사자산으로 바뀌었다고 그렇게 얘기해요. 사자산 자료번호 / 06_12_05_FOT_20161201_BKC_0001 제보자(구술자)..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기산의 미륵댕이와 남밖의 미륵댕이

기산의 미륵댕이와 남밖의 미륵댕이 ▶ 남외리의 미륵댕이와 기산의 미륵댕이는 장흥도호부의 안녕을 위해 세운 미륵이다. 일설에는 우리 미륵댕이, 미륵사가 기산하고 연관돼 있다고. 기산서 우리가 옛날에는 들 가운데 이렇게 꽂혀져 있는 돌을 이렇게 마람으로 덮어가지고 움집을 지어놓고 마을에서 제사장을 뽑았어요. 그래가지고 목욕재계하게 해가지고 약 보름 동안을 이렇게 부부합방도 못하게 하고 제사를 모신, 그렇게 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저는 그 부분을 그렇게 안 봐요, 저는. 장흥 우리 그 동헌을 위주로 봤을 때 남밖에도 미륵이 있었거든, 있었거든. 이건 기산 쪽에 있어서 기산으로 끌어들인 것이지. 저건 제가 봤을 땐 장흥도호부의 안녕을 위해서 남외리와 미륵댕이, 그 일정선 거리에다가 그 하나의, 그 당시에는 미륵..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임목사가 굴러 떨어뜨린 옥녀바위

임목사가 굴러 떨어뜨린 옥녀바위 ▶ 옛날 연대봉 밑에 있는 은경사란 절에는 도승이 살았고 마을에는 기세등등한 임목사란 사람이 살았다. 하루는 도승이 시주를 부탁했으나 임목사가 문전박대했다. 이에 도승은 옥녀바위를 밑으로 굴려버리면 마을에 큰 부자와 인물이 날 것이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욕심 많은 임목사가 하인들을 시켜 옥녀바위를 굴려버리자 그 뒤로 마을에 큰 인물이 안 나왔다. 인제 부암(婦巖)하고 며느리바위라고 그러지요. 며느리 부자니까. 부암하고 우리 마을에는 옥녀봉 설화가 있는데 그동안에 장흥군지나 안양면지에는 설화가 어뜨케 되어 있느냐하면 원래 옥녀바위에는 이렇게 옥녀봉에는 옥녀바위가 있었대요. 그런데 그 옥녀바위하고 며느리바위, 부암 하고의 설화가 지금 며느리 바위 옆에 가면은 상봉 밑에 거기가..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억불바위는 미륵부처

억불바위는 미륵부처 ▶ 억불산의 억불바위는 신령스런 존재였다가 불교가 유입된 후 세상을 구제하는 인민바위, 미륵바위로 공경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억불숭유 정책을 쓴 조선조에 이르러 지아비를 그리워하는 억부바위로 설화가 다시 쓰여 졌을 것이다. 유포되어 있는 그 설화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젠데. 대개 억불산에 있는 바위를 며느리바위라고 그러는데 며느리바위라는 말이 맞기는 맞는데. 인제 그것을 왜 억불산이라 하는가. 억불산이라는 말은 억불바위가 있는 산이기 때문에 억불산이라고 그러는데 그 억불바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옛날에는 여기 저 신라 때는 오현이라고 그랬어. 오현이라고 그랬는데 오현을 그 전에 백제 때 이름은 내가 이제 기억이 잘 안 난다. 오차현인데 가마귀 오(烏)를 쓰잖아. 그닌까 가..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서울 아가씨가 먹고 싶어 했던 한덕산(韓德山) 옹달샘

서울 아가씨가 먹고 싶어 했던 한덕산(韓德山) 옹달샘 ▶ 한덕산에는 옹달샘이 하나 있는데 물맛이 어떻게 좋은 지 서울 아가씨가 한 번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기 쩌가 옛날에 한덕산이락 했어 한덕산. 그 뒷산이 채일 행국이라 해가지고 거 처음에 들온 사람은 지속되지 못하고 인제 늦게 들어온 사람이 그것을 인자 지속된다는 그런 유래가 있습디다, 있고. 또 어른들 말 들으게 되면 그 골짜기에 옹달샘이 하나 있어요. 그란디 서울 아가씨가 한덕산 물 한번 먹었으먼 요원이 없겄다는, 그런 또 어른들한테 그런 얘기도 들었고. 저가 뒷산에 올라가지고 뭡니까 돼지가 크게 구댕이를 파 놨대요. 그것을 보니까 기와가 나와요. 그러니까 옛날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있대요. 그 기와가 나왔더란 말입니다..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사촌 앞 바다에 수장당한 보도연맹 사람들

사촌 앞 바다에 수장당한 보도연맹 사람들 ▶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은 보도연맹 관련 사람들을 두 사람 세 사람씩 엮어가지고 사촌 앞 바다에 수장해 죽였다. 아버지는 인공 시절 반강제적으로 부역을 했는데 수복 후 피신하여 산에 숨어 살다가 경찰의 총을 맞고 숨졌다. 6월 8일이에요. 6월 7일 날 지금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 다 그 안에 다 잡어 가가지고 경찰서에 가둬놨다가 음력으로 6월 8일 날 저닉에 막 둘이 석 서이 석 엮어가지고. 수원서 그때 그 이양수씨라고, 그 배가 쌀을 실고 부산을 다닌 배가, 그때 배로 해서는 한 100톤 가차이 된 배가 있었어요. 그 배에따 싣고 가서 여 수문 앞 바다에다 전부 기양 빠쳐서 수장시켜 죽여부렀어요. 수장시키고 내가 알기로는 총까지 쏴부렀다는..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사촌마을 당제

사촌마을 당제 ▶ 당산할머니 제사는 마을에서 생기복덕한 사람을 유사로 정해 정월 열 사흗날에 모신다. 그리고 보름날은 대동회를 열어 마을 일 년 계획과 대소사를 결정한다. 보름날 저녁에는 봉구를 만들어 달고 용왕님에게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며 돼지머리를 바친다. 우리부락은 그때 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곤란했어요. 왜 곤란했냐 하믄 바로 인자 바다에서 주로 어업에 종사를 했으니까. 그때는 인자 어업기술도 발달이 안 되고 또 이 간석지 여기 뻘에도 조개류 같은 그것이 양식을 할 줄 몰랐어요. 자연산 있어봤자 팔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자 좀씩 잡아다가 자기가 국이나 끓여먹고 그런 상태였고. 또 당산할머니 제사는 풍선이 그때 풍선이 길이가 한 보통 한 4메타 그런 정도밖에 안 될 거에요. 그래 돛대를 두 개 달아..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밀가루 타서 먹고 만든 사촌마을 간척지

밀가루 타서 먹고 만든 사촌마을 간척지 ▶ 1950년대 중후반에 구호물자 밀가루를 타서 먹으며 주로 덕산마을 피난민들이 사촌마을 간척지를 만들었다. 간척이 되고 1962년도에 처음 모를 심었다. 옛날에는 우리 부락이 인자 마을이름에 따라 모래 사(沙)짜 마을 촌(村)짜 사촌인데. 쩌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서쪽에 지금 천구백오십 한 팔년도 오십 한, 사라호 태풍이 났을 땡께 오십 한 오년 육년이나 됐을 꺼에요. 그때 피란 오신 김행선 씨가 여기 우리 안양면 수락리에 정착을 하다가, 그때는 인자 보사부 장관이 친구 였다, 그래요 그 양반. 그래가지고 그때는 인자 먹고살기가 힘드니까 미국 그 잉여농산물 밀가루를, 잉여농산물로 그때는 보조로 마악 온 거이죠. 온 것을 이것을 줄테니까 간척사업을 한번 해봐라. ..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장재도는 학 형국이고 수문은 뱀 형국이라

장재도는 학 형국이고 수문은 뱀 형국이라 ▶ 수문은 뱀 형국이라 뒷산을 땅메 라고 부른다. 장재도가 학 형국이라 수문에서는 학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섶바탕에다 까시나무를 심고 학의 눈을 파 동굴을 만들었다. 왜 땅메라 하냐? 옛날에 뱀 잡으러 댕긴 이들을 보고 땅꾼이라 그래. 그래서 땅메라 불러. 이거 뱀 행국이여. 여그서 보먼 그란디 저쪽에서 보먼 꾸부정.[팔을 꼬며] 그래서 땅메라 그래, 뱀 행국이여. 그라믄 저 장재도, 여기서 보며는 학 행국이여. 그라믄 요리 보고 있어. 이렇게, 지금 주댕이가. 그란디 옛날에 우리 마을 사람들이 사촌보다 훨씬 잘 살았던 거 같어. 그랑께는 저 쪽에다 인자 말하자면 일종의 미신 같지만 잉, 학이 싫어하는 까시나무를 마니 심었어. 사장꼴에도 이런 까시나무가 있었어. 그..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장재도 앞 조그만 바위, 보성여

장재도 앞 조그만 바위, 보성여 ▶ 조선시대 해창에서 조곡을 실은 배가 보성으로 운행하다 장재도 앞 바위에 부딪쳐 파산했다. 가까이 보성이 보이자 장흥원님은 이 바위를 보성 땅이라 우기며 떠넘겼다. 그래서 이 바위를 보성여라 부른다. 쩌 쪽에 사촌 앞에 장재도라고 있잖아. 그 앞에 나간 여보고 보성여라고 그래. 왜 보성여라고 하냐? 전에는 지금은 저 막아져부렀지마는 옛날에는 지천포 그 저 뚝 없을 때는 쩌그 사자산 밑에까장 물이 들어갔거든, 물이. 비동 밑에 까장. 그래 인자 거가 말하자면 해창가 창고여. 조선 때 부텅. 그래가꼬 거그서 말하자면 곡식을 싣고 가다가, 말하자면 장재도 끄터리 여에 나루에서 배가 파산했어. 그란께는 아마 우리 자흥 원님이 더 야물었던 거 같어. 와서는 보고는 보성이 뵈이거든..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소록도로 가는 나환자들의 병이 나았던 샘물과 수문 해수욕장

소록도로 가는 나환자들의 병이 나았던 샘물과 수문 해수욕장 ▶ 수문해수욕장은 예전에 유명했다. 많은 나환자들이 소록도로 가기 전 움막을 치고 지냈다. 시인 한하운도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샛꼴 물이 좋고 해수욕장 뻘물이 좋아 병이 많이 나았다. 우리 여 해수욕장, 해수욕장이. 소록도 갱생원이 지금 백주년인가 넘어갔제? 작년엔가, 언젠가. 갱생원이 생기고 인제 나환자를 수용했거든. 강제수용도 하고 스스로 가기도 하고 그랬어. 그란디 인자 지금 저 한하운이라고 시인 있잖아, 소록도 가면 비도 있어. 그 사람도 요리 지내갔단 말이 있어. 그라믄 전에 내가 어렸을 때 고시원 때 월간지라고 말하자면 그 월간 뭐이라마는 그 책이. 그 보며는 한하운 시인도, 요그요그 가도 가도 전라도길 뭐 붉은 황톳길 말이야 잉,..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임진왜란 때 죽은 사람들의 무덤, 서파당(섶바탕)

임진왜란 때 죽은 사람들의 무덤, 서파당(섶바탕) ▶ 사촌마을 쪽에 어렸을 적 운동장으로 뛰어놀던 백모래밭이 있었다. 사람 뼈가 뒹굴어 다니는 수백 구 묘가 있었다. 아마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죽인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하는데 그곳을 서파당이라 불렀다. 그라믄 인자 서파당(섶바탕) 말이지. 아까 이야기했지마는 우리 마을에가 그 인저 우리는 모르제마는 어느 날 보통 수군통제사가 살았다구. 그 벼슬하는 사람이 주 씨 라고. 그 양반 묘가 우리 뒷산에가 있는디, 가보먼 수군통제사라고 써있어. 그 집 자리가 여그여 바로 이집자리야, 그 사람 산 집 자리가. 그라믄 인자 저 건네 이 동편에 이 서편이구나, 서편에 모랫뜽이거든. 지금은 개발해부럿는디 크은 백모래밭인디. 여그 인자 거가 지역은 사촌 지역이여. 서파당이..

안양면 2017.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