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대덕읍 37

[대덕읍] 친정으로 와서 자석 넷 낳고 살았어

친정으로 와서 자석 넷 낳고 살았어 ▶ 시집을 갔으나 시댁은 너무 가난했고, 남편은 밖으로만 나돌았다. 배를 곯다 곯다 안 되겠어서 친정으로 돌아와서 친정집 살림을 하며 살았는데, 작은 각시를 얻어 살던 남편이 한 번씩 다녀갔고, 아기를 가졌다. 그렇게 자식 넷을 낳아 살게 되었는데, 몸도 아프고 해서 일을 제대로 할 수도 없어서 자식들을 제대로 먹여 키우지를 못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어떻게 잘 자라났고, 지금은 다 제 앞가림을 해가며 잘살고 있다. 배 고파서 살다살다 못살겠길래 도로 친정으로 왔제. 친정의 솥에 붓었던 물만 묵어도 우리 씨계(시댁)보다는 낫겠구나… 그라고 여그를 왔어. 와서 살았어, 친정 살림하고. 살았는디 남편이라고, 그래도 작은 각시 보고 댕겨도 나한테 오믄 이삐서 환장을 하고 찾..

대덕읍 2017.09.18

[대덕읍] 해방 무렵, 옹암에 불어 닥친 태풍

해방 무렵, 옹암에 불어 닥친 태풍 ▶ 일본의 패색이 짙던 해방되기 열흘 전쯤 이곳 남도쪽으로 태풍이 불어 닥쳤다. 상황이 불리해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벼를 모조리 일본으로 빼 가기 위해 배에 실어놓고 있던 때였는데, 그 태풍에 벼가 다 물에 빠져 옹암 쪽으로 밀려오게 되었고,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옹암 사람들도 그 벼를 일본인들 몰래 건져와 먹으면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옹암에서 해방되기 한 열흘 놔두고 태풍이 불었어. 어마어마한 이 태풍이 불었어. 불었는디 그때 당시에 일본 사람들이 상황이 불리해가지고 우리 한국의 나락을 싹 일본으로 빼서 간(갈) 판이여. 인제 싹 일본으로 빼서 간 판인데 태풍이 하다(하도) 부니까 그 나락 실은 배가 요리 피신, 피난을 왔어, 이 바다로. 여긴 안 떠올라 놔서 바람이..

대덕읍 2017.09.18

[대덕읍] 전쟁하다 진을 쳐서 전쟁을 멈추게 했다는 진틀개

전쟁하다 진을 쳐서 전쟁을 멈추게 했다는 진틀개 ▶ 대덕 월정마을 쪽에는 ‘진틀개’라 불리는 곳이 있다. 예전에 전쟁을 하다가 여기에 진을 쳐서 전쟁을 멈추게 한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옛날에 영감이 독(돌) 판께, 밭에 있은께 왔더라게, 군에서. 군에서 와서 ‘이걸 워떻게 어쩌께 해요?’ 그래서 영감이 갈쳐 줬다게. 저거는 까치바우고 저거는 안골, 저 산태뜸이고 뭔 저 꾸지밭등이고 독새굴이고 다 갈쳐주고는 이 아래는 뭐냐 하믄 ‘진틀개’다 했다게, 진틀개. 그란께는 진틀. 전에 대형 전쟁하다가 진틀개에서 진 쳐 갖고 멈췄다. 그라고 적었더라고. 책이 이렇게 나왔대, 우리 식구 책이. 우리 연평 동서가 그 책을 보고 ‘그 책 없애 불지 말고 두고두고 얘기하고 사시오.’ 연평댁이가 그래, 저거 시..

대덕읍 2017.09.18

[대덕읍] 우물물에 불을 띄워 그 불이 오래가면 풍년이라고…

우물물에 불을 띄워 그 불이 오래가면 풍년이라고… ▶연지마을에는 우물이 네 군데 있는데, 예전에는 우물물이 넘쳐흐를 정도로 양도 많고 물맛도 좋았다. 정월 대보름이면 1년에 몇 번씩 청소를 하며 아끼던 우물의 물을 종지에 떠다가 거기 불을 켜서 띄운 후 한해의 가뭄이 드는 정도와 풍작 여부를 점치기도 했는데, 불이 꺼지거나 도난을 당하지 않도록 불을 지키는 일은 아이들의 몫이기도 해서 어둑해져 어른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아이들은 놀면서 불을 지켰다. 이처럼 과거, 연지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식수원이자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놀이터가 되어주던 우물 네 곳에 지금은 다 파이프가 박혀서 예전의 정취를 많이 잃게 되었다. 연지가 우물이 또 많이 있어요, 마르지 않는 우물이. 말 그대로 마르지 않아요. 어떻게 생..

대덕읍 2017.09.18

[대덕읍] 삼형제바위 전설

삼형제바위 전설 ▶ 구술자가 어릴 때 언니들이랑 나무를 하러 다니곤 하던 산에는 삼형제(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삼형제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었다. 어른들 말로는 삼형제가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서는 무언가를 기다리다가 굶주림에 지쳐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삼형제바위. 위치는 정확하게 인제, 언니들한테 물어봐야 돼요. 저는 거기까지 나무 하러 안 다녔어요, 너무 멀어서. - (연지마을에 있는 건가요.) 연지마을이라 하기보다는 연지에서 삼형제바위까지 나무 하러 다녔어요. 근데 여기서 가기가 더 가까워요. 산정마을에서 이쪽 바위가 더 가까워요. 바위가 이렇게 사람 모양인데, 삼형제 닮았대요. 저는 안 봤어요, 거기까지 나무 하러 안 가서. 있는데…. - (지금도 있나요?) 있어요, 바위니까. 있어요. 근데..

대덕읍 2017.09.18

[대덕읍] 벼슬을 따 갖고 오면 기를 세웠던 모종태

벼슬을 따 갖고 오면 기를 세웠던 모종태 ▶ 지금은 황무지로 변해버렸지만 옛날에 과거 시험을 봐갖고 벼슬자리를 따 가지고 오면 이것을 알리고 기리기 위해 기(旗)를 세우던, ‘모종태’라고 불리던 장소가 지금의 양하마을에서 신리 가는 도로 쪽에 있었다. 그 지형을 모종태라고 그래, 모종태. 그것 뭐냐면은 벼슬아치들 과거를 보고 갖고 벼슬을 하고 오믄 거기다 기를 싯더라요. 그 모종 모종태라고 그래요, 거기다 기 시는(세우는) 장소라요, 거기가. - (깃을(기를) 세우는?) 인자 벼슬 해갖고 오믄 그때는 뭐 큰 벼슬, 뭐 암행어사나 감사 같은 거는 못했지만은 뭐 그런 저 촌에서 맨 벼슬로 사니까 그때는. 그런 잘잘…한 벼슬이 많이 있었던 모양… 그런 벼슬을 과거에서 시험봐 갖고 따갖고 오믄 그걸 거그따 심었..

대덕읍 2017.09.18

[대덕읍] 장석을 잠두마을에 세운 사연

장석을 잠두마을에 세운 사연 ▶ 해방 직후, 대덕 잠두마을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남성들이 특히 많이 죽어나갔는데, 어느 날 풍수 보는 이가 와서 잠두마을 건너편 가학마을에 있는 산이 비치기 때문이라며 액운을 방지하려면 마을을 지키는 장승을 세워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이 장승이 나무라 비 등에 취약해 늘 썩어나가는 바람에 나중에는 돌장이에게 의뢰해 장석으로 바꿔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 장석 터라는 것은 그 일제 해방 막 돼가지고 어떻게 전염병, 천연두 막 열병 이런 것이 아주 심했어요. 그래가지고 그 병으로 해서 사람이 많이 죽어, 시골에. 우리 부락에도 그래가지고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과부들이 많이 생개(생겨), 남자들이 마이 죽어. 그란께는 인자 부락..

대덕읍 2017.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