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고초를 겪은 유량마을 유기장인들 ▶ 유량마을은 주민들 사이에 ‘유기마을’로 통하는데, 조선중엽부터 1962년까지 마을전체가 유기를 제조하며 부유하게 살아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군들이 총알을 만들기 위해 유기 재료인 신주를 강탈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큰 고초를 겪었다. 한 유기장은 신주를 숨기고 일본군에 저항하다 절도죄로 유치장에 감금되었는데 억울함에 스스로 벽에 머리를 박고 자결했다. 옛날에 우리 마을이 집성촌이 아니라 타 성 간이 이렇게 모아서 사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마을 형성이 힘들었지. 그래 가지고 경주 김씨하고 여씨가 여그로 와 집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우리 마을이 조리 형국인데 담았다가 풀어 부니까 재산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어요. 그란디 우리 마을이 버드나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