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2017/09/11 10

[의향편] 임진왜란 고경명, 한말 항일의병 고광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고영완

임진왜란 고경명, 한말 항일의병 고광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고영완 ▶ 고경명 장군은 임진왜란 때 3부자가 왜와 싸우다 순절했다. 고광순은 한말에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싸웠다. 고영환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그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 그 할아버지께서는 60세에 밀양부사를 하셨어요. 그래가꼬 그만두고 여기를 오셨는데 광주죠, 지금 잉. 거그 막 오셨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그때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자기 큰아들 종자 후자 그분하고 둘째아들 임자 후자 그분 세 분이서 인자 임란에 참여를 했는데. 막둥이인 용자 후자 할아버지가 있어요. 막둥이. 거가 여섯째였는데 거기서 그때 당시 14살이였는데 “나 따라 갈란다” 말고삐를 잡고 따라갈란다, 한께 “너라도 남아 있어야..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정유재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각왜동(却倭洞) 김응원

정유재란 때 일본군을 물리친 각왜동(却倭洞) 김응원 ▶ 정유재란 시 마을에 살던 김응원이 강진까지 쳐들어온 왜군을 골짜기 나무마다 등을 달아 군진지로 속여 물리쳤다. 그래서 그 골짜기 마을을 각왜동(却倭洞)이라 부른다. 또 그러고 인자 한 가지 유명한 게 머냐며는 각왜동이라고 각왜동. 왜정 거시기 임진왜란하고 정유재란 때, 정유재란 때 그랬다고 한 것 같어. 거시기 정유재란이라고 그랬던 것 같더라고. 이 위에 골짜기가[동네 안쪽을 가리키며] 동네 있었드만이요. 그때는 인자 야지로 안 나오고 골짜기에서 주로 집을 짓고 살았던가. 그래 가꼬 그때 집이 어딘가 그전에 황씨들이 살았던 집인가 모른디 저 어딘가 저쪽 강진 땅으로 해서 그게 기왓장이 요렇게 뚜꺼운 기왓장이 많이 출토되고 그랬어. 지금도 저기 묻힌 ..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이순신 장군이 회령진성 객사터에서 주무시지 않았을까?

이순신 장군이 회령진성 객사터에서 주무시지 않았을까? ▶ 회령진성에 남아 있는 객사 터. 객사란 조선시대 때 왕의 위패를 모셔놓고 한 달에 두 번,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곳으로, 사신이나 중요한 나라의 손님이 묵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도 명량대첩 당시 회진의 이 객사에 머물며 거북선도 정비하고 군량미도 확보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객사 터란 회진서 어렸을 때부터 객사 터, 객사 터라고 그런 지명을 우리가 듣고 자라왔는데 바로 [객사 터를 가리키며] 여기가 객사 터 자리입니다, 여기가. 이 성터 있고, 이 성 안에 있던 자리가 바로 객사 터 자리인데 왜 여길 객사 터라고 했는 것인가? 도대체 객사라고 하는 곳이 뭣인가? 그래서 상당히 궁금해하고 살아왔어요, 뭐. 그런데 객사 터에 대해서 어..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회령진성

회령진성 ▶ 회진성은 1490년 보성 군항리에 쌓았던 것을 회진성의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완도 고금도와 이진성 등이 위치한 이곳으로 옮겨서 1554년에 쌓았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전해 들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명확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것을 분명히 했으면 하는 의견을 말했고, 회진성을 쌓았을 당시에 이곳 회진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생활상도 얘기했다. 더불어 인근 섬마을의 묘터와 장산리 형국을 뱀 형국에서 게 형국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도로 가는 육교를 게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회진에 수군만호가 주둔하면서, 회진성이 성종 제9대 임금이신 성종 21년, 1490년에 회령진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보성 군항리에 있었거든요. 그 다음에 64년 가차이 거가 있다가 회령진을 설치한 이유는 마량과..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선조가 김여중에게 부여한 마을이름, 금곡

선조가 김여중에게 부여한 마을이름, 금곡 ▶ 임진왜란 때 김여중은 백미 300석을 군량미로 내놓는다. 전쟁이 끝나고 선조는 김여중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으나 벼슬을 사양한다. 선조는 중국 진나라 부자 석순이 살았던 금곡을 마을 이름으로 하사한다. 임진왜란 때 우리 마을에가 출중한 어르신들이 숱하게 많이 나오셨어. 에 그때는 공신록이 선무야. 그렇잖소 인자 임진왜란이 선뭅니다. 여기서 선무도 나오셨고 그 여러 훌륭한 어르신들이 나왔는데, 그 진사 벼슬까지 당시에 하셨던 김여중 이시라는 양반이. 그 양반 호가 헌헌이여. 헌헌 김여중이라는 어르신이 나서가지고 모곡 운동을 한 거여, 모곡. 아 전쟁이 벌어졌으니까 군량미를 어떠케 준비를 해야제. 누가 군량미를, 느그가 만들어 달라 해서 한 게 아니고 인자 이 어르..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임진왜란 때 위대기 장군이 돌아가시자 투구와 갑옷을 물고 고향마을로 돌아온 말

임진왜란 때 위대기 장군이 돌아가시자 투구와 갑옷을 물고 고향마을로 돌아온 말 ▶ 임진왜란 때 위대기 장군과 팔 형제가 싸우다 돌아가셨다. 위대기 장군이 돌아가시자 말은 투구와 갑옷을 가지고 장흥 고향마을로 돌아온다. 지금도 철모가 남아있다. 그 분들 거 임진란에 모도 나가서 싸우다가 돌아가신 양반들이 팔 종앙가 있는데 그분들 묘소가 지금 평화 2구에가 있는데. 누가 누군지를 몰라, 우리도 지금. 저거이 없어 시신이 없는 묘여 모도. 그랑께 인자 저 시신을 찾은 분은 거가 있고. 그런데 하도 오래 돼가지고 그 묘를 팔 종앙간, 그라닌까 저 팔 형제들 묘란 말이여. 그란데 거기가 누구 누구 누구 인자 저것은 있는데, 우리한테 기록은 있는데 무덤이 없다 그 말이여. 누군지를 몰라. - (위대기 장군이 돌아가..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임진왜란 때 왜구와 싸우다 돌아가신 초계 변씨 13총

임진왜란 때 왜구와 싸우다 돌아가신 초계 변씨 13총 ▶ 이순신 어머니가 초계 변씨였다. 외가 사람이라 하여 초계 변씨 삼형제를 포함한 여러 가족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그래서 나라에서 배산을 하사하여 초계 변씨 13총 묫을 썼다. 거가 처음에는 거가, 내가 초등학교를 용산서 다녔거든. 용산서 다녔는디 내가 외가집이 용산이었어. 내가 처음에 이집이 우리 마을에서는 제일 오래된 집이 요거여. 그란디 내가 앞만 고쳤지 머리는 그대로 놔뒀어. 나로 하먼은 증조부님, 증조부님이 여, 건축을 했거든. 저 건네 우리 산이 배산이라 한디, 당암리 배산이라 한디. 거가 정예군 묘지, 변씨들. 정예군 묘 초계 변씨 13총. 속은 열다섯 양반인디 두 냥반은 쩌어 경상도로 갔고, 열세 냥반이 15총이여. 열세 냥..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조선의 제갈량 풍암 문위세

조선의 제갈량 풍암 문위세 ▶ 풍암 문위세는 어려서는 퇴계 이황의 문하로 성리학을 공부하고 37세부터 장흥에 거주하면서 도학에 관심을 갖고 후학을 양성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풍암은 59세의 나이에 형제들과 함께 7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보성과 순천, 남원, 무주, 금산, 성주 등지에서 왜적을 맞아 큰 공을 세웠다. 특히 퇴계에게 배운 팔진도 병법은 조선의 제갈량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였다. 이 같은 공을 인정받아 호남 을량사, 용담 현령, 파주 목사로 임명 받고 병조참판으로 증정되어 공신록에 기록되고 있다. 풍암공 문위세의 12대 손입니다. 풍암 문위세는 임진왜란 때 전라좌의병군을 모집해서 저 멀리 경상도 성주 회복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국가에서 인정받아 호남 을량사, 용담 현령, 파주 목사로 임..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임진왜란 의병 문기방과 그의 의마

임진왜란 의병 문기방과 그의 의마 ▶ 문기방은 문위세와 숙질간으로 의향 장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문기방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율장군 휘하의 의병이 되었다. 진주성과 금산산성에서 고진분투하였고 정유재란 중 남원성에서 최후를 맞았다. 남원성 전투에서 문기방이 성문을 지키기 위해 최후까지 문을 붙들고 버티자 왜군이 그의 손목을 절단냈다고 한다. 최후 전투를 앞두고 피로 유서를 남겼는데, 그의 말이 그의 칼과 혈서를 물고 고향으로 와 전했다고 한다. 현재 그의 묘와 함께 말의 무덤도 만들어 기리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충신이 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임진왜란 당시에, 장흥의 향토사를 본다면, 의향의 고향이여.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이런 난이 있었을 때..

문림의향 특집 2017.09.11

[의향편] 귀양 간 천관산

귀양 간 천관산 ▶ 천관산이 이씨조선이 들어선 이래 고흥의 옛이름인 흥양으로 귀양을 갔다는 이야기다. 관산은 고려 때 주요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조가 성립되면서 새 왕조에 불만을 품고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흥양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귀양이라는 것은 고려시대, 또 고려조 때, 뭐 조선조 때 행해지던 형벌 중의 형벌인데. 옛날에는 방축향리다, 하는 정도로 형을 한 거여. 말하자면 죄를 지으면 벼슬을 띠고, 어느 지역 일정 장소의 바운다리 안에서만 거주하도록 그런 것이 가벼운 형을 했는데, 훗날 도배, 뭐 유배 뭐 이런 형식으로 먼 곳으로, 그 원지에다가 보내면서 최소한도의 지역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도록, 이렇게 좀 강화된 것이 유배형인데, 우리 천관산을 흥양 천관산으로, 흥양으로 ..

문림의향 특집 2017.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