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2017/09/19 32

[용산면] 백제의 멸망을 상징하는 장흥 임(任), 마(馬), 위(魏)성씨 세 할아버지들의 슬픈 무덤 삼성총

백제의 멸망을 상징하는 장흥 임(任), 마(馬), 위(魏)성씨 세 할아버지들의 슬픈 무덤 삼성총 ▶ 백제가 나당연합군과 전쟁을 벌이던 때 계산마을 뒤 동백쟁이에는 장흥 임씨, 마씨, 위씨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모두 전쟁에 나가고 세 성씨 할아버지 세 분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젊은이들이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들은 한 집에서 죽어있었다. 그래서 이 세 성씨 할아버지들을 함께 무덤을 써서 삼성총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우리 계산마을에 옛날부터 그 흘러서 전해서 내려오는 얘기 중에서 삼성총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 삼성총이 내려왔던 지금 현재 그 지역은 어디를 얘기하냐면, 우리 계산마을이 옛날에는 8반까지 있었는데 반으로 따지면, 지금 현재는 7반까지 있어요. 7반까지 있는..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큰 용이 잠들어 있는 활성안

큰 용이 잠들어 있는 활성안 ▶ 용산 계산마을 뒤에는 활성안이란 성이 있다. 그리고 활성안에서 안양 지천까지 산줄기를 따라 큰 용이 누워있었다. 그런데 장흥읍에서 관산으로 통하는 도로를 내면서 그 용의 허리를 건드리자 용이 놀래서 그 활성안 계곡으로 떨어져 잠들었다. 우리 마을에 인자 학성안이라는 성이 있는데 흔히 학성안이라고 하기도 하고 활성안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쭈욱 내려온 얘기를 들어보면 안양하고 우리 용산하고 거쳐서 그런 전설들이 쭈욱 있는 것 같애요. 그래서 인제 보면 그 안양면 지천, 거기가 앞에가 그 쪼끄만 산이 있었는데 그 산만큼 큰 용이 활성안하고 그 안양 지천 산하고 쭉 연대해서 줄기를 따라서 이렇게 누워있었는데. 인자 그 이렇게 장흥읍에서 관산으로 가는 그 도로를 내다보니까,..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조부님의 권유로 상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사람

조부님의 권유로 상금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사람 ▶ 옛 어르신 중에는 한글을 개글이라고 했다. 장흥중학교 졸업하고 조부님의 권유로 상금 서당을 다니며 논어까지 공부했다. 덕분에 한학에 있어서는 누구에게 아쉬운 이야기를 하거나 물어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조상이 요리, 금일읍에 지금 금일읍이지 않습니까, 거기서 계시다가. 또 인자 섬에서 그 분들이 생겨서 섬에서 일생을 마치고 자손들을 섬에다 남겨놔야, 이런 의욕적인 생각에 육지로 그냥, 나는 비록 섬에서 살았었제만 자손까지 섬에다가. 그때만 해도 섬이 그렇게 좋은 터전으로는 인정이 안 되았었죠. 그거를 탈피하기 위해서 요리 나오셨나 봐요. 그렇게 해갖고 인자 여그 나오자 인자 제가 한 2년 후에 어머니 뱃속에 생겼드래요. 그래갖고 나서..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무너뜨린 시루바우 밑에 깔린 산삼

무너뜨린 시루바우 밑에 깔린 산삼 ▶ 옛날 송전마을에는 진원 박씨들이 큰 세를 이루며 잘 살았다. 하루는 중이 동냥을 왔는데 너무 인색하게 대했다. 중은 마을 뒤에 있는 시루바우를 가리키며, 저 시루바우가 안 보이게 무너뜨리면 더 잘 살게 될 거라고 말했다. 이후 시루바우를 무너뜨리자 얼마 안 있어 박씨들이 쫄딱 망해 마을을 떠났다. 시루바우가 떨어진 자리에서 자라던 산삼을 다 덮어버렸다. 어느 날 그때 그 어떤 분으로 해서 시루바우 얘기를 내가 한번 들었거든요. 그렇게 해갖고 그 얘기가 좀 빠뜨린 점이 있을랑가 몰겄습니다마는 인자 좀 하면은. 여기하고 이 건너하고가 같은 송전이고, 여기는 초당이고 그렇습니다. 그란디 인자 행정구역이 똑같죠. 그란디 송전마을에가 진원 박씨들이 시절을 이루고 잘 살았드래요..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소쿠리 터 아름드리 동백나무를 건들자 집에서 떠나버린 용

소쿠리 터 아름드리 동백나무를 건들자 집에서 떠나버린 용 ▶ 소쿠리 형국의 집안에는 아름드리 엄청나게 큰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어느 날 나무장사가 그 동백나무를 사려해서 계약을 했다. 그날 밤 꿈에 용이 나타나 지붕을 한 번 휘익 감고는 떠나가 버렸다. 이후 계약은 포기했으나 그 동백나무는 끝내 고사했다. 그때 재미있는 일화가 또 한 가지 기억이 납니다. 뭐냐하면 그때 백씨인데 그 아재가 인제 저한테 이집을 파셨는데. 그 아재가 한 번은 이집에 계실 때, 지금 이 사랑채 뒤에 동백나무가 어마어마한 게 있었대요. 그래가지고 그 나무가, 다들 그렇게 기억했답니다. 이 초당하면 초당 서재 옆에는 동백나무, 어마어마했답니다. 그 동백나무가 그렇게 아름다리 컸었는데. 한 번은 나뭇꾼이, 나무 사는 사람이 ..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아부지가 삼아준 짚신 신고, 고구마 싼 보자기 들고 다니던 학교 가는 길

아부지가 삼아준 짚신 신고, 고구마 싼 보자기 들고 다니던 학교 가는 길 ▶ 초등학교 다니던 때 가난해서 아버지가 삼아준 짚신을 신고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까만 물을 들인 무명보에 고구마를 싸 주었다. 그때 당시 담임선생님이 배급 나온 쌀을 더 주어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는 누구든지 보릿고개 가난하게 살았어 이. 논 스무 마지기만 가지믄 일꾼 둘 데리고, 대학 한나 갈치기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런데 요새는 오십 마지기, 삼십 마지기 지어가꼬는 대학 못 갈쳐. 일꾼 둘 데꼬, 그때는 농경사회라 구십구 프로가 다 가난했어, 가난했어. 그라믄 인자 쪼깐 밥술이나 묵은 사람은 고무신을 신어. 그때 껌은 고무신을. 근데 나는 고무신도 업써. 아부지가 짚신을 삼아줘. 그라믄 요 저 ..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누나는 목화 심어 베를 짜고 동생은 성을 쌓고

누나는 목화 심어 베를 짜고 동생은 성을 쌓고 ▶ 말 먹인 활성안이 있다. 그 성을 놓고 전설이 있다. 누나는 목화 심어 베를 짜고 동생은 저 성을 쌓는 내기를 했다. 누군가 지면 죽는 내기였다. 누나가 보니 동생 일이 하 세월이라, 동생 죽는 꼴 볼 수 없어 포기하고 잠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라고 쩌그 활성안에는 말 먹였다, 그래. 성이 있는데 그 성 같이 큰 성은 없어, 밸라. 흙으로 매논데 돌로 매논데. 가서보믄 이 둘레가 아마 한 20리 될랑가. 흙으로만 모아논 디도 어마어마하고 돌로 탁 탁 세와서 해논 데는, 그 힘이 없을 꺼인디 기계가 없을 꺼인디. 갈 수도 없고 먹척통에서 탁 짤라분 거 맹이로 한 오 메타 그런 데도 한반 데가 있어. 그래가꼬 인자 그 활성안인데 그것을 인자 정부에서 키..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길전식 사무총장까지 준공식에 온 구루막 다리

길전식 사무총장까지 준공식에 온 구루막 다리 ▶ 마을 앞에는 예전에 물길 때문에 건널 수 없어 나락 실은 구루마를 멈쳐야 하는 구루막 장소가 있다. 60년대 이장 하면서 관에 요청하여 시멘트 다리를 놓아 준공식을 하는데, 그 당시 공화당 길전식 사무총장도 참석했다. 엄청나게 차 못 들어댕겼습니다 옛날에, 못 들어댕겼는데. 그건네 거 오리막, 들어가자보먼 다리 있지요. 다리 건네가 구루막 장소여. 구루막 장소란 별명이여. 왜 다리가 없으니까 구루마도 그 동네로 못 들어간단 이야기여. 그래서 나락이나 보리나 전부 전해, 구루막 장소로. 그러고 그래도 인자 물을 못 건네도 다리를. 다리는 타관 사람들이 산이 많이 타관 사람 산이여. 그란케 솔 요론 놈을[두 팔을 둥그렇게 펼치며] 양보를 받어서 비어가꼬 부락사..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반란군은 반란군대로 우리를 죽일락하고 경찰은 경찰대로 밥 해줬다고 죽일락하고

반란군은 반란군대로 우리를 죽일락하고 경찰은 경찰대로 밥 해줬다고 죽일락하고 ▶ 밤이면 무서워서 반란군들이 하라는 대로 밥 해주었다. 그러면 낮에 경찰들이 들어와서 밥 해주었다고 때리고 죽이려고 했다. 그런 험한 세상을 살았다. 전쟁 때 피해가 큰 피해, 사람이 죽고 살고 그런 피해는 없어도 상당하니 모도 그때 그랑께. 엊그젝께도 우리가 경찰이 와서 그런 얘기를 했는데. 그전에는 반란군이란 것이 있었어. 그란디 그 반란군은 글자 그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반란군이 아니고 그때 6·25 때는 이북사람들이 내려와서 여그를 점령을 했을 때, 그 사람들이 반란군이제 이러트먼. 그란디 다시 점령을 한국에서 해가지고 그 사람들이 못 올라가고 산에가 숨어있는 사람이 반란군 아니라고. 그 반란군이 우리 동네를 자주..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암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자포치(雌抱雉) 포곡(蒲谷)마을

암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자포치(雌抱雉) 포곡(蒲谷)마을 ▶ 포곡은 자포치라 하는데 암놈 [자]에 안을 [포], 꿩 [치]를 써서 암꿩이 알을 품은 형국이다. 마을에서 장흥읍 평화로 넘어가는 자포치재가 있다. 암놈 [자]짜여, 그랑께 암꿩이라 그 말이여. 또 안을 [포]짜, 꽁 [치]그래서 여가 자포치. 암꽁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그렇게 해서 자포치. 자포치락 했는디. 그전에는 교통이, 인자 차가 없고 할 때는 여그 여곳이 이 재가 자포치재여, 자포치재. 그랑께 우리들이 할 때는 자포치잰디 이거슬 다른 사람들이 부를 때는 자푸지재, 자푸지재 그랬거든. 즈그들이 해석을 하기를 어쩌냐 그라면 잡놈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 길이라 그래서 자푸지다 자푸지다, 그렇게 얘기를 했어. 비하 했제. 그란디 ..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고려시대 전쟁 말을 믹이고 키운 활성안

고려시대 전쟁 말을 믹이고 키운 활성안 ▶ 돌로 쌓은 성벽과 함께 성터가 남아있다. 초등학교 때 거기로 소풍을 자주 갔는데 선생님에게 이곳이 옛날 전쟁을 하는데 말을 키우는 데라고 들었다. 그라먼 저쪽에가 억불산 밑으로 저리 가믄 활성안이거든. 그라먼 요 산 뒤에는 모산이고, 저 산 뒤에는 계산이 있고. 쩌그만 넘으먼 안양이고 그라거든. 그래 쩌그 활성안인디. 그 전에 거 활성안이라는 데가 어째서 활성안인가 어른들보고 인자 얘기를 들었는디. 그때가 그랑께 무슨 시대였으까 그때가, 고려시대나 되았으까. 그때 이러트먼은 마부들이 말을 전부다 갖다가 거그따가 믹에서 전쟁말로 쓸라고, 말을 믹이는 장소라 그래가꼬 활성안이라 그란다 저그보고. 그란다고 그 얘기를 해쌌트라고. 거가 성이, 계산 쪽으로 성이 쭈욱 이..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삼십포 바다 속에는 밀항선 배 한 척이 침몰해 있었다

삼십포 바다 속에는 밀항선 배 한 척이 침몰해 있었다 ▶ 어렸을 적 삼십포 바다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조개와 장어를 잡아다 먹었다. 미군정 시기에는 밀항선 한 척이 끌려와 삼십포 바다 속에 쳐 박혀 썩어갔다. 여그서 쩌 그 나무. 인자 우리가 히엄을 쳐가지고 인자 쩌기 여그[지금은 논이 된 옛 삼십포 바다를 가리키며] 한 가운데만치 가먼. 거그서 인자 업져서 물속으로 들어가서 보먼 갱조개라고 있어요, 요만쓱한 꼬막 같은 거. 그거를 많이 캐다가 집에서 쌀마 묵고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게도 여그서, 뻘게 그런 것도 많이 나오고. 그때는 일본으로 뭐냐먼 간 사람들이 많앴제, 밀항을 인자 돈 벌라고. 밀항자는 못가니까. 그래가지고 여기가 또 무슨 사건이 있냐 그라면은. 그때 양놈들 미국놈들이 여기 주둔하고 ..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건달들이 기생들과 장구 치며 놀았던 삼십포

건달들이 기생들과 장구 치며 놀았던 삼십포 ▶ 삼십 가구가 넘으면 망하고 삼십 가구가 되면 흥한다 해서 삼십포라 했다. 여러 건달들이 와서 기생들과 장구 치며 놀 정도로 삼십포는 왁자지껄 했다. 거문도 배가 들어와서 초가를 엮을 짚을 사가고 소록도에서는 광목을 가져와 땔감과 교환해 갔다. 그래 인자 삼십포 여기가 인자 흥하먼 흥하고 망하먼 망하고. 그래서 집이 삼십 가구가 너머지먼 망하고 말하자면 나 듣기로는 삼십 가구가 되먼 흥하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삼십포다, 요로코 유래가 나왔든 갑디다. 그라고 여그 청년들이 무쟈게 억세요, 여그 청년들이. 그랑께 딴 청년들이 여그 와서 말하자먼 띵깡을 못 부리고. 그라고 여가 기생집이 있었고 술집이 한 서너 군데가 있었고. 그랑께 맹상은 건달들이라는 사람들이 여그..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삼십포구와 해양문화가 발달했던 용산 남하

삼십포구와 해양문화가 발달했던 용산 남하 ▶ 간척이 되기 전 아랫마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시절, 삼십포구에 남면 면사무소가 있었다. 거문도에서 들어오는 멸치를 받아 이 근방 전 지역에 보급할 정도로 포구가 활발하고 풍족했다. 저희 이제 남하는 지금 현재는 인제 귀농하고 귀촌하신 분들이 상당히 많이 와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들을 보며는 사람들 성품이라든가 사람과의 관계를 상당히 중요시 하고, 외지에 분들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명 자체도 옛날에는 저희들이 남상 남하면, 용산지역이 남상면이었고 이쪽에 죽청, 하발 까지가 인제 남하면이었는데. 지명 자체도 맞는 것 같에요, 지금 현실하고 외형적으로. 순 인자 남쪽으로 남하한[웃으며] 양반들이 우스메 소리..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부용산 물로 만들어 술맛이 좋았던 국정(麴井)

부용산 물로 만들어 술맛이 좋았던 국정(麴井) ▶ 지금 용인은 예전에는 누룩쟁이, 국정이라고 불렀다. 약다산 이라고도 불리는 부용산 물로 만드는 술이 너무 유명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조장이 없어졌지만 여전히 물이 좋아 장흥, 안양, 관산, 대덕 사람들도 용산목욕탕을 찾아온다. 어 제가 살고 있는 마을 용산면 소재지. 현재는 마을 명이 용인이라고 하는데 과거에는 인암리였습니다 거가. 인암리였는데 1986년도에 용인리로 그렇게 분구가 됐어요. 용인은 왜 용인이라고 했냐? 용산이라 해서 [용]자하고 인암이라 해서 [인]자하고. 도장 [인]자. 그래서 용인리, 이렇게 이름이 현재 지어져 가지고 지금 나오고 있는데. 그 우리 용인리는 옛날에 말씀 들어보니까 누룩쟁이, 국정(麴井). 팽야 국정이라는 말이 누룩이라..

용산면 2017.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