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2017/09 296

[안양면] 해창곡식창고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

해창곡식창고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 ▶ 해창에는 창고가 두 개 있었는데 한국전쟁이 나자 양곡을 다 쟁여놓고 지켰다. 하지만 반란군들이 쳐 들어와서 아버지와 친구, 그리고 청년까지 세 사람이 학살당했다. 지금은 남해고속도로가 생겨서 선박이 운영을 안 하니까 거의 폐촌이 되어 버렸다. 창고 두 개였었어요, 원래는. 그런데 이 6·25 사변 후로 일사후퇴 때. 51년도 1월 8일 날이 일사후툅니다. 압록강까지 갔다가 뒤에 후퇴할 띡에. 그랑께 공산당이 밀려오니께 다시 양곡을 다아 쟁에놨어요, 한나도 갖다 안 뺏길라고. 그런디 음력으로는 섣달 스무날인데 양력으로는 1월 며친 날, 확실히는 모르겄습니다마는 이 공산당이 여그를 방어할라고 쳐들어왔어요. 그란디 그때 안양파출소에서 나오고 학생도, 나도 그때 학생이었습니..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뱀장어 잡는 법을 새롭게 개발했던 고흥 사람

뱀장어 잡는 법을 새롭게 개발했던 고흥 사람 ▶ 장흥에서 일본 사람들이 제일 먼저 들어온 데가 해창이다. 해창 앞 바다에는 실뱀장어가 아주 많았으나 먹을 줄을 몰라 팔지 못했다. 어머니가 일본 사람인 고흥 사람이 와서 카바이트 가스등을 나눠 줘가지고 아주 쉽게 뱀장어를 잡을 수 있었다. 여가 일제 때 회진도 있고 죽청, 수문도 있는디 일본 사람들 제일 몬자 대여섯 가구가 우리 마을로 들어왔어요 여가. 그람 뭐이냐면 이 마을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실뱀장어가 만안 뎁니다. 그거이 많기 따문에 배가 이로끄롬 쪼그만하니 납작한 배가 이런 식으로 된, 요로끔 납작하니 되아가지고 갈쿠 맨이로 여기따 대고 이러케 뜨먼 뱀장어가 올라온 거야. 그럭큼 많에 써거 빠졌어. 그라믄 지금으로부터 한 50년 전에까, 50년..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완도 금당도에서도 고기 잡아 장 보러 왔던 해창포구

완도 금당도에서도 고기 잡아 장 보러 왔던 해창포구 ▶ 해창은 배가 주요 교통수단이던 한 때 멀리 완도 금당도 뿐 아니라 관산 죽청에서도 드나들던 활발한 포구였다. 짐을 실은 트럭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장흥 장을 보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농어, 숭어 등 물고기 천지였다. 그러먼 인제 보면은 그때 당시 머 십 원도 받었고요. 그러믄 여기서 가먼은 풍길, 풍길 그라믄 두암 풍길 이러케 있거든요. 그라고 그 옆에 가먼 남포, 산정 이. 이제 또 여 상발 이, 여기 가먼 또 죽청. 그라먼 이 그때 보면은 요. 인제 죽청 같은 데서 관산읍으로 나가기가 멀고 그러닌까 산길을 타나서. 그라고 여기는 여기 해창은, 왜 이리 오느냐 그 사람들이 와요. 그러믄 장날이면은 배가 차 같이 다니거든요. 화물차가 짐을 실고..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정월 초사흘에 모시는 당제

정월 초사흘에 모시는 당제 ▶ 해창은 예전부터 당제를 모셔왔다. 마을 당집과 당산나무, 그리고 선창과 마을 곳곳에서 모신다. 어느 땐가 삼, 사백년 된 당산나무가 죽어가서 다시 심었는데 지금은 아름드리가 되었다. 지금 그 해창 보믄 당제라고 있거든요, 당제가 있는데. 거기 보면은 에 비석이, 부사들. 거 쇠로 돼있고 쇠 있고 또 석비가 두 개 있고 그 쇠로 된 비석이 두 개 있어. 부사들이, 아마 행적비 같에요. 이 쇠 주물로 해논 것은 아마 일제강점기 당시 그렇게 해서 일본놈들이 했지 않은가. 나머지 두 명은, 그란께 탁본이 될랑가 모르겠습니다마는 말이 이렇게 훼손되부렀어요. 형체는 남아있어요. 형체는 남아있고. 거기는 그 저희들이 당제라고 해가지고 매년 정월 1월 3일이믄 당제를 모셔요. 근데 그 당..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낭구치, 목단(木端)에서 목단(牧丹)으로 바꾼 마을 훈장님들

낭구치, 목단(木端)에서 목단(牧丹)으로 바꾼 마을 훈장님들 ▶ 마을에는 대대로 훌륭한 훈장 선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어르신들이 나무 木, 끝 端을 쓰던 마을 이름을 牧丹으로 고치셨다. 목단이란 마을은 딴디서 부터 여그를 낭구치라고 이 사투리로 그런 말을 했었는디,이 나무 [목]자 끝 [단]짜를 해가지고 목단마을이라고 했었는디. 중년에 우리 마을에 이 어르신들이 서재를 많이 운영하고 그렇게 모도 유식한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었는디. 그 어르신들이 나무 [목]자 끝 [단]짜를 쓴 것보다는 먹일 [목]자 붉을 [단]자를 쓴 것이 더 낫것다 해가지고는 그 글짜를 바깠답니다. 그래서 지금은 현재는 먹일 [목]자 붉을 [단]짜를 쓰고 있습니다. 서당은 그 맨 처음에 그 냥반들이 쩌어 상금서 요리 이사와가지고 산..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물이 귀해 여자들이 밤새 샘물을 기르느라 가족계획이 필요 없던 마을

물이 귀해 여자들이 밤새 샘물을 기르느라 가족계획이 필요 없던 마을 ▶ 우리 마을은 옛날부터 물이 귀했다. 그래서 양사마을 앞에 들물을 먹고 여자들이 메구 치고 올라가 무등등 샘에서 기수굿을 드렸다. 여자들이 밤새 통샘에서 물을 기르느라 애 만들 시간이 없어 군사정권 시절 가족계획(둘만 낳아 잘 기르자)도 필요 없었다. 물이 없어 우리 마을이. 마을이 물이 없어 가지고 샘을 파는데 동재가 상댕이 없어졌어. 물, 물 먹을라고 인자 샘을 파잖아, 인력으로. 그때는 기계가 없응께. 그란께 인건비 주고, 인건비 주고 그래갖고 동재가 바닥이 나다시피 해부렀거등. 동네 돈이. 그래가지고 가만 있어, 저 샘을 몇 년도에 팠다냐, 회관에. 그래가지고 물을 어서 길러다 묵냐면 들샘, 인자 잉 들에 농사 질라고, 그때는 ..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동학혁명 때 모래기라 불리며 큰 피해를 입은 모령

동학혁명 때 모래기라 불리며 큰 피해를 입은 모령 ▶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는 관군이 미륵댕이 주막에서 모령을 찾으려고 물으니 수양 밑에 마을이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관군이 잘못알고 수양 아래 조그만 마을인 하양으로 쳐들어가 마을주민들 다수를 학살했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모령마을 사람들도 다수 희생을 당했다. 동학 때 우리 마을이 어뜨게 해서 피해를 봤냐면은 그 인자 우리 마을을 칠라고 왔어. 오다가 미륵덩이라고 있거든. 장흥하고 안양하고 경계에 미륵덩이 있제, 기산 그 옆에. 거기 와서 주막에 와가지고 모령이라는, 그란께 그때는 동학 때는 모래기락 했어. 모래기가 어디냐 그란께 수양 밑에가 모래기라 그러니까. 수양 밑에가 하양이라는 데가 있죠, 거 쪼그만한 마을 여그 여 저 사장나무 있고. 그 동네가..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임금산 제암산(帝岩山), 임금 스승이 나는 사제산(師帝山)

임금산 제암산(帝岩山), 임금 스승이 나는 사제산(師帝山) ▶ 제암산은 임금 제 자를 쓰는 전국 유일 산이고 사제산은 임금의 스승이 나올 산이다. 사자산은 인제 하기야 조선 명종 때부터 사자산이라고 기록이 되어 오는 거 보니까 조선시대부터 사자산이라고 한 것 같은데 일선에 의하면 사제산이었다, 그래요. 사제산. 우리 제암산은 임금 제(帝)자를 쓰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산이 제암산이잖아요. 그라면 동천 쪽에서 보면은 병풍, 어병산이고 우리 기산 쪽에서 보면은 고려시대에 사제산이었다, 임금의 스승이 나올 산, 사제산. 그런데 명나라 시대에 와가지고 사자 형국이 됐다 해서 조선시대에 사자산으로 바뀌었다고 그렇게 얘기해요. 사자산 자료번호 / 06_12_05_FOT_20161201_BKC_0001 제보자(구술자)..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기산의 미륵댕이와 남밖의 미륵댕이

기산의 미륵댕이와 남밖의 미륵댕이 ▶ 남외리의 미륵댕이와 기산의 미륵댕이는 장흥도호부의 안녕을 위해 세운 미륵이다. 일설에는 우리 미륵댕이, 미륵사가 기산하고 연관돼 있다고. 기산서 우리가 옛날에는 들 가운데 이렇게 꽂혀져 있는 돌을 이렇게 마람으로 덮어가지고 움집을 지어놓고 마을에서 제사장을 뽑았어요. 그래가지고 목욕재계하게 해가지고 약 보름 동안을 이렇게 부부합방도 못하게 하고 제사를 모신, 그렇게 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저는 그 부분을 그렇게 안 봐요, 저는. 장흥 우리 그 동헌을 위주로 봤을 때 남밖에도 미륵이 있었거든, 있었거든. 이건 기산 쪽에 있어서 기산으로 끌어들인 것이지. 저건 제가 봤을 땐 장흥도호부의 안녕을 위해서 남외리와 미륵댕이, 그 일정선 거리에다가 그 하나의, 그 당시에는 미륵..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임목사가 굴러 떨어뜨린 옥녀바위

임목사가 굴러 떨어뜨린 옥녀바위 ▶ 옛날 연대봉 밑에 있는 은경사란 절에는 도승이 살았고 마을에는 기세등등한 임목사란 사람이 살았다. 하루는 도승이 시주를 부탁했으나 임목사가 문전박대했다. 이에 도승은 옥녀바위를 밑으로 굴려버리면 마을에 큰 부자와 인물이 날 것이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욕심 많은 임목사가 하인들을 시켜 옥녀바위를 굴려버리자 그 뒤로 마을에 큰 인물이 안 나왔다. 인제 부암(婦巖)하고 며느리바위라고 그러지요. 며느리 부자니까. 부암하고 우리 마을에는 옥녀봉 설화가 있는데 그동안에 장흥군지나 안양면지에는 설화가 어뜨케 되어 있느냐하면 원래 옥녀바위에는 이렇게 옥녀봉에는 옥녀바위가 있었대요. 그런데 그 옥녀바위하고 며느리바위, 부암 하고의 설화가 지금 며느리 바위 옆에 가면은 상봉 밑에 거기가..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억불바위는 미륵부처

억불바위는 미륵부처 ▶ 억불산의 억불바위는 신령스런 존재였다가 불교가 유입된 후 세상을 구제하는 인민바위, 미륵바위로 공경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억불숭유 정책을 쓴 조선조에 이르러 지아비를 그리워하는 억부바위로 설화가 다시 쓰여 졌을 것이다. 유포되어 있는 그 설화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젠데. 대개 억불산에 있는 바위를 며느리바위라고 그러는데 며느리바위라는 말이 맞기는 맞는데. 인제 그것을 왜 억불산이라 하는가. 억불산이라는 말은 억불바위가 있는 산이기 때문에 억불산이라고 그러는데 그 억불바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옛날에는 여기 저 신라 때는 오현이라고 그랬어. 오현이라고 그랬는데 오현을 그 전에 백제 때 이름은 내가 이제 기억이 잘 안 난다. 오차현인데 가마귀 오(烏)를 쓰잖아. 그닌까 가..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서울 아가씨가 먹고 싶어 했던 한덕산(韓德山) 옹달샘

서울 아가씨가 먹고 싶어 했던 한덕산(韓德山) 옹달샘 ▶ 한덕산에는 옹달샘이 하나 있는데 물맛이 어떻게 좋은 지 서울 아가씨가 한 번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기 쩌가 옛날에 한덕산이락 했어 한덕산. 그 뒷산이 채일 행국이라 해가지고 거 처음에 들온 사람은 지속되지 못하고 인제 늦게 들어온 사람이 그것을 인자 지속된다는 그런 유래가 있습디다, 있고. 또 어른들 말 들으게 되면 그 골짜기에 옹달샘이 하나 있어요. 그란디 서울 아가씨가 한덕산 물 한번 먹었으먼 요원이 없겄다는, 그런 또 어른들한테 그런 얘기도 들었고. 저가 뒷산에 올라가지고 뭡니까 돼지가 크게 구댕이를 파 놨대요. 그것을 보니까 기와가 나와요. 그러니까 옛날에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이 있대요. 그 기와가 나왔더란 말입니다..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사촌 앞 바다에 수장당한 보도연맹 사람들

사촌 앞 바다에 수장당한 보도연맹 사람들 ▶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은 보도연맹 관련 사람들을 두 사람 세 사람씩 엮어가지고 사촌 앞 바다에 수장해 죽였다. 아버지는 인공 시절 반강제적으로 부역을 했는데 수복 후 피신하여 산에 숨어 살다가 경찰의 총을 맞고 숨졌다. 6월 8일이에요. 6월 7일 날 지금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 다 그 안에 다 잡어 가가지고 경찰서에 가둬놨다가 음력으로 6월 8일 날 저닉에 막 둘이 석 서이 석 엮어가지고. 수원서 그때 그 이양수씨라고, 그 배가 쌀을 실고 부산을 다닌 배가, 그때 배로 해서는 한 100톤 가차이 된 배가 있었어요. 그 배에따 싣고 가서 여 수문 앞 바다에다 전부 기양 빠쳐서 수장시켜 죽여부렀어요. 수장시키고 내가 알기로는 총까지 쏴부렀다는..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사촌마을 당제

사촌마을 당제 ▶ 당산할머니 제사는 마을에서 생기복덕한 사람을 유사로 정해 정월 열 사흗날에 모신다. 그리고 보름날은 대동회를 열어 마을 일 년 계획과 대소사를 결정한다. 보름날 저녁에는 봉구를 만들어 달고 용왕님에게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며 돼지머리를 바친다. 우리부락은 그때 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곤란했어요. 왜 곤란했냐 하믄 바로 인자 바다에서 주로 어업에 종사를 했으니까. 그때는 인자 어업기술도 발달이 안 되고 또 이 간석지 여기 뻘에도 조개류 같은 그것이 양식을 할 줄 몰랐어요. 자연산 있어봤자 팔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자 좀씩 잡아다가 자기가 국이나 끓여먹고 그런 상태였고. 또 당산할머니 제사는 풍선이 그때 풍선이 길이가 한 보통 한 4메타 그런 정도밖에 안 될 거에요. 그래 돛대를 두 개 달아..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밀가루 타서 먹고 만든 사촌마을 간척지

밀가루 타서 먹고 만든 사촌마을 간척지 ▶ 1950년대 중후반에 구호물자 밀가루를 타서 먹으며 주로 덕산마을 피난민들이 사촌마을 간척지를 만들었다. 간척이 되고 1962년도에 처음 모를 심었다. 옛날에는 우리 부락이 인자 마을이름에 따라 모래 사(沙)짜 마을 촌(村)짜 사촌인데. 쩌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서쪽에 지금 천구백오십 한 팔년도 오십 한, 사라호 태풍이 났을 땡께 오십 한 오년 육년이나 됐을 꺼에요. 그때 피란 오신 김행선 씨가 여기 우리 안양면 수락리에 정착을 하다가, 그때는 인자 보사부 장관이 친구 였다, 그래요 그 양반. 그래가지고 그때는 인자 먹고살기가 힘드니까 미국 그 잉여농산물 밀가루를, 잉여농산물로 그때는 보조로 마악 온 거이죠. 온 것을 이것을 줄테니까 간척사업을 한번 해봐라. ..

안양면 2017.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