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2017/09 296

[용산면]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를 쳐 생긴 용천폭포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를 쳐 생긴 용천폭포 ▶ 용이 꼬리를 쳐 생긴 용천폭포에는 동우(독그릇)쏘와 독아지쏘, 접시쏘와 구시쏘가 있다. 어렸을 적 여름이면 용천폭포에 올라가 시원한 물속에서 놀았다. 옛날에 용천폭포가 제가 알기로는 어르신들한테 들은 말에 의하믄, 저기 요리 물이 내려오잖에, 이 우게 올라가믄 용수등 이라고 있어요. 거기 바로 앞으로 해서 쩌어 산골로 빠져 나갔어요. 근데 이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그 옛날에 용이 올라가면서 용꼬리가 쳐서 거기가 지형이 낮아요, 용천 폭포가. 지금 숲이 우거져서 그라제. 그란디 거가 낮은디 올라가면서 용꼬리가 쳐서 거가 허물어지니까 낮은 지대로 물이 흐르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 거기가 물이 내려간께 거가 그 낙차 높이가 상당히 높아요. 그래가지고 용천폭포가 되..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호랑이 도편수 이수길(이윤곤)

호랑이 도편수 이수길(이윤곤) ▶ 마을에 살던 이수길씨는 호랑이란 별명이 있었는데, 강진 군동에서 제각을 짓는다고 가서 치목해놓은 목재를 보고 고주 하나가 빠진 것을 발견할 정도로 문화재급 도편수였다. 그 냥반은 본명은 이수길씨고 마을에서 부르는 존함은 윤곤씨라고 불렀어, 이윤곤씨라고. 그란디 우리는 어려서 그런 거 쩌런 거 모르제. 모른디 지금 그 냥반이 살어계시며는 우리 대한민국에 문화재급 목수여 대표적인 목수라고. 왜 그라냐며는 내가 에려서 거기를 비정이라는 데를, 그 냥반이 건축을 해갖고 아주 잘 해놨었어. 그란디 지금은 인제 이대 삼대가 지나다 보니까 지금 믹해 버리고 집도 개축도 안 하고. 그래가꼬 인제 머 가서 보면 쓸모가 없는 그런 데가 되야있는디. 아무튼 그 냥반이 훌륭하신 것이 왜 훌륭..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장원급제한 어산마을 이승(李昇)

장원급제한 어산마을 이승(李昇) ▶ 장원급제한 이승은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산중처사로 여생을 마쳤다. 집터가 한나 좋은 거이 났다 해싸서, 바로 이 우게 대밭 있는 집이. 그 집이 나로 하며는 12대조 할아버지닌까 한 400년, 약 한 400년. 그 할아버지가 어산을 최초로 들어오셔 가지고 그 집터를 잡어서 사시면서. 원래 그 냥반 고향은, 12대조 할아버지 고향은 용산면 금곡이여 하금. 하금에서 어산으로 올라오신거제. 그래갖고 여기서, 전설을 보면 여기서 지금 말하며는 사법고시제, 그 때 과거. 그란디 그 때 과거가 지금 사법고시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고 그라더라고. 왜 어렵냐며는 그 때는 고을마다 향교가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전라남도에도 몇 군데만 향교가 있었다 하드라고. 그란디 2년에 한 번씩 그 ..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신하들이 임금에게 우산을 받치고 있는 형국, 어산(御傘)

신하들이 임금에게 우산을 받치고 있는 형국, 어산(御傘) ▶ 어산의 펼쳐진 뒷산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우산을 받치고 있는 형국으로 마을에서 인물들이 나올 것이다. 그렇지 어산리, 법정단위는 어산린데. 옛날에 지명은 임금 [어]짜, 암행어사라 해서 임금 어(御) 짜고 우산 산(傘) 짜. 그랑께 어뜬 사람들이 이렇게 보며는 뒷 형국이 임금이 우산을 받치고 있는 이런 형국이다, 신하들이 양쪽에서 우산을 받치고 임금은 가운데가 있고 그런 형국이래 여그가. 그래서 언젠가는 이제 모르긴 모른디, 언젠가는 여그서 임금이 나올 것이다, 지명으로 봐서. 그 인제 차츰차츰 뭐가 되야간 것이 어찌 그러냐 하믄. 이 옆에가 인제 교도소 들어왔지, 인자 지명으로 해서. 그런 걸 보며는 여그 이 마을에도 언젠가는 지금 서광이 비치..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아래채 마루 밑 땅속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의 화승총

아래채 마루 밑 땅속에서 발견된 동학농민군의 화승총 ▶ 동학농민혁명 이후 숨겨놓았던 화승총을 일가친척 집안 여러 곳에 옮기며 숨겨놓았다. 마침 큰집 형님이 결혼하는 아들집을 개축하려고 아래채를 뜯는데 마루 밑 땅속에서 개머리판은 썩고 총열만 남은 화승총을 발견하여 지금 보관하고 있다. 화승총은 인제 어르신들 얘기를 들어보며는, 에~ 한동안은 애기들이 아까 무서와서 고광에다가 숨겨놨다가. 또 작은 집이가 아버지 형제분이 4형제 분이신디. 백부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두 번째가 우리 아버지고, 세 번째 작은 아버지 집에다 또 갖다 숨겨놨다가. 고걸 어떠게 어떠게 해서 이제 질게 보관을 못할테니까, 인제 큰 집이 할아버지 댁에 마루 밑에따가 아마 놔둔 것이 개머리판은 썩어 불고, 그 총열만 살아있어 가지고. 그 ..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힘이 장사였던 문병곤

힘이 장사였던 문병곤 ▶ 문병곤 집안은 대대로 힘이 장사고 재력도 있었다. 보통사람은 어깨 밖에 안 찰 정도로 기골이 장대했다. 훌륭한 양반이었는데 시국을 잘못만나 장흥경찰서장을 하다가 물러났다. 아까 참 우리 문씨들. 문씨들이 자자일촌할 때 그 냥반은 나는 이제 어려서 기억을 못한디, 여기 이 마을에가 문병곤씨라는 훌륭하신 분이 한분 계셨어. 기운도 장사지 재정도 넉넉했지. 또 그래갖고 그 냥반이 유학을 어디로 갔냐 그라믄 그 때 시절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다고 하더라고. 그래갖고 일본 가서 유도를 배우시다가 들어셔 가지고, 시국이 변동이 안 되았으면은 대단히 크실 양반이었어. 그란디 시국변동 때문에 장흥경찰서장까지 안저가지고, 장흥사람들한테 못해보고 물러나부렀다 하시더라고. 그렇게 훌륭하신 분인디, ..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혈을 자르자 벌 한 쌍이 피를 흘리며 날아가버려 몰락한 벌국재

혈을 자르자 벌 한 쌍이 피를 흘리며 날아가버려 몰락한 벌국재 ▶ 벌국재에는 힘이 센 진원 박씨들이 살았다. 하지만 인색하여 베풀 줄을 몰랐다. 하루는 동냥 온 사람이 괘씸하게 생각하여 벌국재를 자르면 더 잘살게 될 거라고 권유했다. 벌국재를 자르자 벌 한 쌍이 피를 흘리며 날아가버렸는데 그 뒤로 마을이 몰락했다. 어째 거그 살다가 잘 살다가 이러께 뭐시냐 분산이 되야브렀냐 하면은, 나 어른들 말 듣기로는. 그때 인자 그 바랑을 짊어지고 동냥을 하러 댕긴 사람들이 있던 모양이여, 벌국재에가. 간디 하루는 그 냥반이 와서 동냥을 잔 달라고 그랑께 인자 돌아 댕겼던 모냥이야. 그랑께 아 멫 집이 간께 약간 안 좋게해. “그라믄 당신들 더 잘살게 해 줄테니까 내 말 한번 들을라냐고.” 그 당시는 심도 있고 하..

용산면 2017.09.20

[용산면] 일본 유학 가서 유도를 배워, 가르친 일본 선생도 제압한 문병곤

일본 유학 가서 유도를 배워, 가르친 일본 선생도 제압한 문병곤 ▶ 문병곤의 아버지도 힘이 장사였다. 이를 물려받은 문병곤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 유도를 배웠는데, 자신을 가르친 일본인 선생도 제압할 정도였다. 해방공간에서 활동을 하다 행방불명되었다. 원래 문병곤씨 그 냥반 아버지가 원래 장사였어. 뭐 아는 것도 없고 뭐 힘이 어떻게 장사던지 뭐 짐을 지고 가믄, 이 지게 통발이 딱 어디 걸리믄 똑 떨어져 나가브러도 이 그란지 저란지 모르고 짐을 그라고 지고 다니고 힘이 그렇게 씨었다, 그래. 거그서 인자 문병곤이가 거그서 태어났어. 아 인자 일제강점기에 그 뱅곤이가 인자 사회주의자로 활동을 했다고 그래요, 말 듣기로는. 또 그래가지고 인자 일본 사회주의 하다가 일본으..

용산면 2017.09.20

[용산면] 교도소가 들어선 도둑막등

교도소가 들어선 도둑막등 ▶ 지금 교도소가 들어선 도둑막등에는 옛날에 큰 마을이 있었다. 그런데 하도 도둑이 들끓어 사람이 살 수가 없어 마을이 사라져버렸다. 마을이 있을 만큼 잘 생긴 터다. 에 어른들한테 말 듣기로는 원래가 교도소 자리가 원래 큰 부락이 있었다고 그래요. 그러닌까 우리 부락보담 오히려 거가 더 큰 부락이 거가. 보기에도 우리가 흙을 파믄 꺼마니 그런 흙이 나오고. 거가 내 땅이 한 삼 천 평 이상이 있습니다만은 영락없이 사람이 산, 밭을 파 보믄 흔적이 그런 흔적 같어. 거기서 그렇게 살었는데 옛날에는 하도 거 도둑이 심해 도둑이. 그라믄 거기서 인자 도둑놈들이 늘 하도 그 많이, 그 죽고살고 해 논 것을 다 모도 털어가고 하니까. 인자 우리 부락하고 서로 연락이 되야가지고 서로 머시..

용산면 2017.09.20

[용산면] 부용사의 역사와 동학농민혁명

부용사의 역사와 동학농민혁명 ▶ 부용사는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대찰로 나와 있다. 아마도 지금의 용산면사무소 자리가 부용사의 입구였을 것이다. 하지만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부용사로 피신 온 수많은 농민군을 죽이면서 부용사도 불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부용산 계곡으로 3개월 동안 핏물이 흘렀다고 한다. 여기 제가 알기로는 문헌에는 그렇게 나와있더라구요.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정확하게 기록이 있어요. 여기가 고려시대 대찰로 나와있더라고. 그냥 조그만 절이 아니고 암자가 아니고, 절 입구가 면사무소 있는데 거기로 알고 있거든요. 제가 외국에서 있을 때 한 17년 전인가 차를 여러 대를 빌려가꼬 한바퀴 돌았는데, 면사무소 있는데 대탑이 세 개가 있는 걸로 내가 기억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탑이..

용산면 2017.09.20

[용산면] 처녀귀신 여섯 명을 만난 일곱 총각들

처녀귀신 여섯 명을 만난 일곱 총각들 ▶ 가설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노두를 건너던 일곱 총각들 앞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처녀귀신 여섯이 나타났다. 하지만 수가 안 맞는지 처녀귀신들이 그냥 가버렸다. 어 또 거 그것은 저희 형님 이야긴데 도깨비들이 이렇게 다리를 건너가다가. 지금도 이야기 해주시는데 우리 형님이 냇가 냇가를 건너가시는데, 밤에 열두시 에 옛날에 가설극장이라고 있자나요. 영화를 보고 친구들하고 친구 여섯 명하고 인자 열두시 너머서 냇가를 건너갔는데. 아 이쪽에서 도깨비 거 귀신들이 여섯 명인가 일곱 명 오드라요, 불이. 불이 하나가 딱 내려오드만, 다리를 건너가고 노두 노두 돌다리를 건너가고 있는데 중간에 가고 있는데 딱 내려와가지고는. 딱 보니까 멀리서는 불이 하나였는데 와서 보니까 불이 여..

용산면 2017.09.20

[용산면] 나물 뜯고 약초 캐고 나무하고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린 부용산

나물 뜯고 약초 캐고 나무하고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린 부용산 ▶ 어머니와 보리밥 덩어리 싸서 나물 뜯고 나무하러 부용산에 다녔다. 어머니는 약초 캐면 약초이야기, 나물 뜯으면 그 나물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때는 모두가 아궁이에 불을 때던 시절이라 부용산이 거의 나무가 없을 정도로 헐벗었다. 이쪽은 산이 가깝고 저기 접정은 산이 없기 때문에 이산을 인자 어머니하고 나무하러 다녔고. 풀도 하러 다녔고 또 그 나물 뜯고. 그라고 인자 어떠게 보믄 이산이 부용산이 어머니하고 같이 인자 워낙 생활을 많이 했고. 머락하까요, 삶의 터전이라 봐야제. 나무도 하고 나물도 뜯고. 삽주라고 창출, 또 머 도라지 더덕 또 머 참나물, 참나물 유명했고 뭐 그런 종류죠. 인자 옛날에 업시산께 시장에따 팔고, 먹기도 하겄지만 ..

용산면 2017.09.20

[용산면] 오두재 성황당 돌무덤과 어머니

오두재 성황당 돌무덤과 어머니 ▶ 부용산 오두재 넘어가는데 성황당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물 장사 다니면서 돌을 던져놓고는 했는데 큰 돌무덤이 되었다. 성황당이라고 있거든요, 어머님이. 재에 가먼 서너 군데 있어요, 이 부용산에가. 오두재라고 저 재 너머가는 데 있는데. 어머니가 그런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어머니 장에 가실 때 나물 장사 다니면서, 거깃다가 거 돌을 꼭 한두 개씩 던져놓고 간대요. 그 날 거 재수가 운수가 봐주라고, 그렇게 빌고 가는 거죠. 오면 가면서. 근디 잔 놀랬어요. 어머니가 일부러 옛날부터 이렇게 쌓아논 것이 아니고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하나 두 개씩 모아 논 것들이 큰 돌무덤이 됐다, 그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어머니도 갔다 오먼 솔까지 끄너다 놓고 돌 놓고, 내가 그걸 봤거든요. 자..

용산면 2017.09.20

[용산면] 들길은 신발, 산길은 맨발로 가는 대덕장 나물장사

들길은 신발, 산길은 맨발로 가는 대덕장 나물장사 ▶ 어머니는 친구와 함께 삼사십 리 대덕장으로 큰 산을 두 개 넘으며 나물장사를 하러 걸어 다녔다. 어머니는 신발을 아끼려고 남이 안 보는 산길에서는 맨발로 남이 보는 들길에서는 신고 걸어 다녔다. 네 걸어 다니고, 어머니 또 그런 이야기했어요. 우리 마을에서 두 분이, 어머니 친구하고 같이 나물 장사 다녔는데, 삼십 리 길이죠 대덕까지. 삼사십 리 길인데 들을 지나갈 때는 신 신고, 산을 갈 때는 맨발로 가셨다는 거에요, 맨발로. 신발이 달을까봐. 신발 아낄려고. 근께 들에 사람들이 일하고 있을 때는 넘보니까 어려우니까 신발 신고, 산에 가실 때는 누가 본 사람이 없고 산길을 갈 때는. 이 산을[부용산을 가리키며] 두 개 넘죠. 그라고 대덕 가는데. 들..

용산면 2017.09.20

[용산면] 왜정 때 호식(虎食) 당한 시신을 이장한 할아버지

왜정 때 호식(虎食) 당한 시신을 이장한 할아버지 ▶ 왜정 때 서당 대숲 뒤에서 호랑이에게 한 사람이 물려갔다. 아주 깊은 산골창에 물어다 놔서 그 자리에다 묘를 썼다고 한다. 해방 후 어느 시기에 이장을 하려고 파묘를 했더니 뼈는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운주저수지 아래로 이장을 했다. 옛날에 여가 호랭이가 살뜩에는 이 건네[개울 건너 앞마을을 가리키며] 마을에서 어느 할머니 한 분이 밤에 잠자다가 호랑이 손에 물려가꼬. 여가[손목을 만지며] 숭터가 있어. 그 냥반은 같이 살다가 돌아가셨제. 그라고 또 옛날에 여가 서당 했을 적에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밤이먼 초저녁에 이렇게 운동 하니라고 동네를 이렇게 돌잖아요. 학생들이, 서당 학생들이. 그러다가 이 건네 여 저저 저 대샆 뒤에서 호식해 갔어요, 한 분...

용산면 2017.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