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2017/09 296

[안양면] 장재도는 학 형국이고 수문은 뱀 형국이라

장재도는 학 형국이고 수문은 뱀 형국이라 ▶ 수문은 뱀 형국이라 뒷산을 땅메 라고 부른다. 장재도가 학 형국이라 수문에서는 학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섶바탕에다 까시나무를 심고 학의 눈을 파 동굴을 만들었다. 왜 땅메라 하냐? 옛날에 뱀 잡으러 댕긴 이들을 보고 땅꾼이라 그래. 그래서 땅메라 불러. 이거 뱀 행국이여. 여그서 보먼 그란디 저쪽에서 보먼 꾸부정.[팔을 꼬며] 그래서 땅메라 그래, 뱀 행국이여. 그라믄 저 장재도, 여기서 보며는 학 행국이여. 그라믄 요리 보고 있어. 이렇게, 지금 주댕이가. 그란디 옛날에 우리 마을 사람들이 사촌보다 훨씬 잘 살았던 거 같어. 그랑께는 저 쪽에다 인자 말하자면 일종의 미신 같지만 잉, 학이 싫어하는 까시나무를 마니 심었어. 사장꼴에도 이런 까시나무가 있었어. 그..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장재도 앞 조그만 바위, 보성여

장재도 앞 조그만 바위, 보성여 ▶ 조선시대 해창에서 조곡을 실은 배가 보성으로 운행하다 장재도 앞 바위에 부딪쳐 파산했다. 가까이 보성이 보이자 장흥원님은 이 바위를 보성 땅이라 우기며 떠넘겼다. 그래서 이 바위를 보성여라 부른다. 쩌 쪽에 사촌 앞에 장재도라고 있잖아. 그 앞에 나간 여보고 보성여라고 그래. 왜 보성여라고 하냐? 전에는 지금은 저 막아져부렀지마는 옛날에는 지천포 그 저 뚝 없을 때는 쩌그 사자산 밑에까장 물이 들어갔거든, 물이. 비동 밑에 까장. 그래 인자 거가 말하자면 해창가 창고여. 조선 때 부텅. 그래가꼬 거그서 말하자면 곡식을 싣고 가다가, 말하자면 장재도 끄터리 여에 나루에서 배가 파산했어. 그란께는 아마 우리 자흥 원님이 더 야물었던 거 같어. 와서는 보고는 보성이 뵈이거든..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소록도로 가는 나환자들의 병이 나았던 샘물과 수문 해수욕장

소록도로 가는 나환자들의 병이 나았던 샘물과 수문 해수욕장 ▶ 수문해수욕장은 예전에 유명했다. 많은 나환자들이 소록도로 가기 전 움막을 치고 지냈다. 시인 한하운도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샛꼴 물이 좋고 해수욕장 뻘물이 좋아 병이 많이 나았다. 우리 여 해수욕장, 해수욕장이. 소록도 갱생원이 지금 백주년인가 넘어갔제? 작년엔가, 언젠가. 갱생원이 생기고 인제 나환자를 수용했거든. 강제수용도 하고 스스로 가기도 하고 그랬어. 그란디 인자 지금 저 한하운이라고 시인 있잖아, 소록도 가면 비도 있어. 그 사람도 요리 지내갔단 말이 있어. 그라믄 전에 내가 어렸을 때 고시원 때 월간지라고 말하자면 그 월간 뭐이라마는 그 책이. 그 보며는 한하운 시인도, 요그요그 가도 가도 전라도길 뭐 붉은 황톳길 말이야 잉,..

안양면 2017.09.25

[안양면] 임진왜란 때 죽은 사람들의 무덤, 서파당(섶바탕)

임진왜란 때 죽은 사람들의 무덤, 서파당(섶바탕) ▶ 사촌마을 쪽에 어렸을 적 운동장으로 뛰어놀던 백모래밭이 있었다. 사람 뼈가 뒹굴어 다니는 수백 구 묘가 있었다. 아마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죽인 사람들일 거라고 짐작하는데 그곳을 서파당이라 불렀다. 그라믄 인자 서파당(섶바탕) 말이지. 아까 이야기했지마는 우리 마을에가 그 인저 우리는 모르제마는 어느 날 보통 수군통제사가 살았다구. 그 벼슬하는 사람이 주 씨 라고. 그 양반 묘가 우리 뒷산에가 있는디, 가보먼 수군통제사라고 써있어. 그 집 자리가 여그여 바로 이집자리야, 그 사람 산 집 자리가. 그라믄 인자 저 건네 이 동편에 이 서편이구나, 서편에 모랫뜽이거든. 지금은 개발해부럿는디 크은 백모래밭인디. 여그 인자 거가 지역은 사촌 지역이여. 서파당이..

안양면 2017.09.25

[용산면] 묵촌의 문방사우와 동백숲

묵촌의 문방사우와 동백숲 ▶ 마을에 부용산 줄기인 필봉(붓), 그 아래 서있는 현암(벼루), 그 앞에 청수리(네개 물줄기), 그리고 따밭(종이 생산)이 있는데 먹이 없어 묵촌이라 이름지었다. 또한 마을 앞에 동백숲을 조성하여 어산 쪽 옹기 구울 때 점등에서 나오는 불빛을 가렸다. 묵촌은 상당하니 오래된 고촌인데. 고촌이라고 인정할라는 것은 그 머야 그 돌로 그 머라그라재, 고인돌. 고인돌 같은 것이 여러반데가 산재해가지고 옛날에 보믄 상당히 오래된 마을이여. 거 인제 기록으로 보먼, 나로 하먼 십대 조부님 [유]짜 할아버지, [유]짜 할아버지가 어산에서. 자기 할아버지가 진사, 진산데 어산에서 묵촌으로 분가를 해서 묵촌을 세웠다. 그란께 그 때 묵촌은 그 양반 비롯해서 그 후로 안씨, 송씨, 이 분들이 ..

용산면 2017.09.25

[용산면] 한국전쟁으로 엇갈린 독립운동가들

한국전쟁으로 엇갈린 독립운동가들 ▶ 장흥지역에도 일제강점기 농민회 사건 등 독립운동이 활발했다. 그 중에는 친일로 변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해방 공간에 독립운동가들 다수가 좌익에 가담했다. 좌익에 연루된 독립운동가는 보훈 대상에서 제외되고 친일을 했더라도 먼저 죽은 사람은 보훈 대상이 되었다. 대구 고법 판결문 있어. 글로 해서 보훈대상도 되고. 또 그란디 그분들이 나중에 전부 좌익을 했어. 그래갖고 좌익을 해가지고 그 혐의로 해서 감옥에 간 사람들은 원호 대상이 안 되고. 그 중에서 나중에 변절 되야갖고 친일한 양반도 있고 이. 끝까지 주장하다가 잡혀서 한 사람 보훈 대상이 안 되고. 유재승씨라고 그 양반이 수두(首頭-우두머리)고 저그 석동. 그라고 인암 정진수씨라고 그런 양반, 그 두 양반이 ..

용산면 2017.09.25

[용산면] 힘이 장사고 좌익 거물이었던 어산 사람 독립운동가 문병곤

힘이 장사고 좌익 거물이었던 어산 사람 독립운동가 문병곤 ▶ 어산 사람 문병곤씨는 두 사람이 양팔을 붙잡고 서있어도 버티던 장사였다. 해방 후 좌익활동을 했지만 일제강점기 농민회 사건에 연루된 독립운동가로 장흥지역의 거물이었다. 특별히 이 동네 사람들이 모가 안 나요, 모가 안 나갖고. 밤에는 좌익 낮에는 우익.[웃음] 그란디 여기서 인자 좌익 중에서도 거물이. 저 위에 지금 대밭이 없어져버렸는데, 대밭 그 제일 위에 대밭 속에 있는 그 사랑방 식으로 있는디 우리 큰댁인디. 주로 거그서 많이. 아래서 모도 온 성 싶으믄 얼른 대밭 딛고 인자 산으로. 문병곤씨라고 거물이 있었어요. 용산 어산 사람이에요. 어산 사람인디 여그 와서 많이 피했어요. 저 왜정시대 체육 전문 출신. 일본서 유도. 우리가 봤어 어려..

용산면 2017.09.25

[용산면] 대학생 모자만 보아도 순경인 줄 알고 놀라 숨었던 한국전쟁

대학생 모자만 보아도 순경인 줄 알고 놀라 숨었던 한국전쟁 ▶ 한국전쟁 때는 무법천지였다. 지서 주임에게 총살권이 있어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 마을 인심이 좋아 몇날 며칠이고 경찰이 머물면 돼지며 무엇이며 잡아 먹였다. 심지어 마을에서는 멀리 대학생 모자만 보여도 경찰인줄 알고 사람들이 숨었다. 그때 선거가 6·25 든 핸가 그 앞 핸가. 앞 해 그 저 오 뭐 뭔 데이 노동날. 그 그런 거 있그던. 메이데이 그날 습격당했어, 공비들한테. 그 산 속에서 우장 쓰고 나와서 지나가는 차 습격하고. 6·25 인자 직후로 평정이 안 되얐을 때 그때 지서 주임에까지 총살권이 있었거든. 그때 우리가 열두 살, 어려서 들어봤어. 그란디 그때는 교통이 안 좋아. 추럭에서 추럭에다 관산서 인자 그 범인을 실고 장흥..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건너 마을 아가씨들이 보고 바람 난 남근석

건너 마을 아가씨들이 보고 바람 난 남근석 ▶ 남근석 두 개가 마을 앞에 서있었다. 건너편 아가씨들이 바람난다고 한 개는 어디 파묻어버리고 지금은 한 개가 남아있다. 여그 마을 앞에 들오먼은 마을 앞에, 그 전에 마을 앞에가 그 돌이 있어, 돌이 비석 같이 세워진 거. 아마 그 마을, 지금으로 말하믄 정문 같은 그런 형식으로 해서 아마 있었던가 봐요. 근데 지금 보면은 돌이 있는데. 옛날 어른들 말 들어보믄, 우리는 모르제 인자. 근데 어른들 말 들어보믄은, 그 돌이 저 우리 축사 밑에 보면은 돌 이렇게 한나 서갖고 있는 것이 있어요, 입석 같이 서갖고. 이쪽에는 없어져 가지고 이런데. 그 옛날 어른들 말 들어보믄 그런 속설이 있어. 어떻게 있냐 그라믄 그 돌이 남근석이기 때문에 저 건네서 상금, 하금서..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정장은 솥 형국, 척산은 밥주걱 형국

정장은 솥 형국, 척산은 밥주걱 형국 ▶ 정장은 솥 형국이고 척산은 밥주걱 형국이다. 그래서 척산에서 밥을 퍼간다, 생각하고 마을 앞에 솔나무를 많이 심어 척산을 가렸다. 저 앞에[마을 앞 동산을 가리키며] 여 솔대뜽이라는 데가 있어요. 우리도 지금 나무를 심어 가지고 관리 하고 있는데. 그 전에는 마을 입구 막 들어서서 소나무가 이렇게 쭈욱 깊어가지고, 이렇게 쭉 요렇게 들어왔거든요. 그라고 마을이 순전히 아조 산중에 가 있는 마을이 되얐었어. 그란디 그때 당시에 어른들 말 들어보믄 여가 솥 행국이기 때문에. 그니까 척산이라는 데가 척산 주산이 밥 주걱. 밥 주걱 알지요, 밥 푸는 거 인자 이 밥주걱 이런 식으로 되야갖고 있어서 그 형국이. 여그는 솥이고 거그는 밥주걱이기 때문에 쩌어 마을 가리지 않으..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정장(鼎藏)이 아니고 정장(正莊)이여

정장(鼎藏)이 아니고 정장(正莊)이여 ▶ 정장은 형국으로 보면 솥 정, 감출 장을 써서 정장(鼎藏)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용산면 청원계책에 보면 이미 400전 전에 바를 정, 엄숙할 장을 써 정장(正莊)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니, 1932년에 다시 정장(正莊)이라고 쓴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거기 보면은 옛날에 정장이라는 이름이 솥 정(鼎)자 감출 장(藏)자 그래갖고 정장이었다, 이렇게 해갖고 인자 그랬는데. 1932년에 1932년이믄 지금 얼마 안됐거든. 32년이믄 지금 한 80 몇 년 됐것구나. 그 정도 됐는데 그때 행정구역 개편 시에 지금의 정장이라고 이렇게 지금은 바를 정(正)자 흙 토에… 그 장(莊) 자를 쓰고 있는데 정장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걸 1932년에 행정구역 개편 시에 이렇게 동..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유치 빨치산 토벌하러 갔다가 강진, 장흥에서 최초로 전사한 경찰 형님

유치 빨치산 토벌하러 갔다가 강진, 장흥에서 최초로 전사한 경찰 형님 ▶ 한국전쟁 전 해방공간에 아버지가 반란군들에게 피살을 당하자 형님은 경찰에 입문한다. 강진 옴천지서에서 근무하며 그 동네 제일 부잣집 딸과 결혼한다. 하지만 전쟁 중에 장모와 아내가 다시 반란군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복수한다고 유치 토벌 작전에 나갔다가 전사한다. 제가 그 6·25를 젂었던 이야기를, 우리 가정이야긴데 좀 말씀드리고 싶어서. 내가 그 지금 유가족이 된 이유가 저 6·25 전에는 이 반란군들이라고 산에 댕긴 사람들, 좌익들. 말하자면 지금으로 말하자면 공산당들이지. 그 사람들이 산에서 굴 파놓고 산 시대였거든요, 6·25 전이여 그때는. 그랬는디 인자 그 분들이 우리집 패망을 시키는 것이. 우리 아버지가 참 그때 당시 변..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밀대, 친일을 해서 먹고 산 사람들

밀대, 친일을 해서 먹고 산 사람들 ▶ 일제강점기 6학년이 되어 해방 되었다. 그 전에 한국말 하면 벌을 주고 창씨개명을 당했다. 그래서 5, 6학년이 되어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 어느 마을이나 밀대, 친일파들이 활약했다. 6학년 된 게 해방 됐어. 일본말 조금 배왔제. 거 자네도 카도 안가 카도. 카도 저 한국말 하믄 카도 뺐어. 카도 저 머시기 여 한국말 하믄. 카도를 딱 나나조가꼬 한나 앞에 스무 장쓱 엄마 쓱인가 나나주고, 한국말 하믄 카드 주라게, 한국말 했다고. 그래가꼬 일본놈들이 그런 짓거리를 했어. 나중에 검사 하믄 제일 없고 떨어진 놈은 한국말 많이 한 놈인께 욕봐, 그놈을. 아 지금 생각하믄 창씨를 개명하고 말이여. 지금 생각하먼 모르고 살었는디 아아, 일본..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고사하면 또 심고 또 심고 누대에 걸쳐 두 그루 정자나무를 심어온 쌍정(雙亭)마을, 접정(接亭)

고사하면 또 심고 또 심고 누대에 걸쳐 두 그루 정자나무를 심어온 쌍정(雙亭)마을, 접정(接亭) ▶ 저드리 들판에 두 그루 정자나무를 심어 아름드리가 되자 쌍정이라고 했다. 저드리 두 그루 정자나무가 죽자 지금 접정 자리에 다시 두 그루를 심었다. 이러한 일이 누대를 걸쳐 진행되었다. 접정마을은 나로 해서 13대조 이청강 선생이란 양반이 계셨어. 그 양반이 손자 시슬, 서이를 나셨는디. 한 분은 어산 상파, 한 분은 묵촌파, 그 한 분은 접정판디 싯짜치나. 그래서 어산서 어서서 하뤼 쉬다가 싯짜치를 행제 저더리 뒷까끔 너무로 해서 저더리로 해서 접정 부근으로 저금을 내셨어. 그래가지고 그 저드리 앞에다가 두 구루 정자를 세웠는디 그 정자가 아람맥이 서너, 인자 아람맥이[두 팔을 둥그렇고 넓게 펼치며] 여..

용산면 2017.09.21

[용산면] 어인(御印)바우가 있어 인암(印岩)

어인(御印)바우가 있어 인암(印岩) ▶ 마을 산에는 능바우라고 했던 어인바우가 있다. 그래서 마을이름이 인암이 되었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와 매생이를 생산했다고 해서 매산바우도 있다. 당초에는 쩌그 저 머시기 서강 앞으로 서강대가 있었어요, 머시기. 거가 우리 마을이 형성이 돼 갖고 거그서 살았던갭디다. 그란디 거가 이 산중이고 그래가지고는 차근차근 내려온 것이 지금 이 인암으로 왔어요. 그때는 인암이라고도 하고 구명이 능바우라고 했어요. 능바우. 그란디 여기가 여 모탱이가 가면 어인바우라고 바우가 하나 있어요, 바로 여기 가면은. 그란디 꼭 어인 모냥으로 사각으로 돼야 갖고. 그 바우가 옛날부터 전해 온 것이 어인바우 라고 그래가지고. 당초에는 여가 능바우였는디 그래서 어인바우라 해서 ..

용산면 2017.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