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림의향의 향맥을 지키며,장흥의 문화를 일구어 갑니다

장흥문화원(문림의향 장흥설화)

2017/09/19 32

[용산면] 눈이 무릎까지 쌓인 한겨울에 비둘기 고기를 구해서 병든 어머니를 치료한 효자

눈이 무릎까지 쌓인 한겨울에 비둘기 고기를 구해서 병든 어머니를 치료한 효자 ▶ 한 겨울에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비둘기 고기를 먹고 싶다 하셨다. 아들은 눈이 푹푹 빠지는 겨울산을 헤매다녀도 비둘기를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내려오는데 나무 위에서 비둘기가 뚝 떨어졌다. 아들이 구해준 비둘기 고기를 먹고 어머니는 오래오래 장수했다. 근디 우리 척산마을이 형성되는 과정을 먼저 말씀을 드리고 그담에 우리 선조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척산마을이라는 곳은 나로 하며는 십사 대 할아버지가 충청도에서 감산가 뭐 하셨다고 그래요, 이조 시대 때. 그런 벼슬을 하시다가 옛날에는 그 모략이 많지 않습니까, 요새 같으며는 좌익우익 하대끼. 옛날은 노론 소론, 남인 북인, 해가지고. 고런 것에 여튼 모략에 ..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스님의 말을 들은 뱅영쇠가 터를 잡아 성촌한 월정

스님의 말을 들은 뱅영쇠가 터를 잡아 성촌한 월정 ▶ 부잣집에서 머슴살이 하던 뱅영쇠가 하루는 나무를 하러 갔다가 허기진 스님 한 분을 만났다. 뱅영쇠가 자기가 싸온 밥을 주자 스님은 감동하여 터를 잡아주었다. 뱅영쇠가 그 터에 집을 짓고 살며 머슴살이를 벗어나고 성촌하였다. 월정의 유래가 기본이 그 마을이 없었는데. 우리 뒷집이 지와집이 누대 지금 10대 이상 됐소. 그런 집인디 거기 와서 고입(雇入)한 분이 뱅영서 왔던가 뱅영쇠라고 여기서는 그렇게 불렀답니다. 예전에는 인자 천인들 쇠 자리를 놓거든. 뱅영쇠라고 했다고. 그래가지고 그분이, 지와집 산이 저 건네 초당 뒤에가 있어요. 거기서 나무를 하는데 여기서 머닌까 거리가 머닌까 점심을 싸다놓고 나무를 했던 모냥이에요. 그런디 중이 거그서 잔 쉬어가..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조선시대 벼슬을 한 삼형제가 심은 삼우송

조선시대 벼슬을 한 삼형제가 심은 삼우송 ▶ 마을에는 이조 현종 때 벼슬을 한 삼 형제가 있었다. 그래서 삼 형제는 소나무 세 그루를 각자 심었다. 지금은 큰 형이 심은 소나무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노후하여 죽었다. 삼우송은 이조 현종 때 우리 마을에 삼형제 분이 나셨어. 큰 아드님이 부령부사를 하시고, 둘째가 진사, 진사를 하셨는디 서울 태학골에 가서 강령 공부를 하시니라고 서울 가 쭉 계셨고. 그라고 셋째 분이 비변사낭 비별낭청이라고 한디 그걸 내가 생각 해 본께 성균관이여. 성균관을 직계로 보니까 3품에서부터 9품까지 있대요. 그랑께 품계가 어느 정도 된지는 그것은 짐작을 못 하겄고. 그래서 삼형제 분이 한 집이서 태어나가지고 그렇게 벼슬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분들이 모정이라고 여기 솔나무, 그거를 ..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주역을 공부했던 진수재(進修齋) 서당

주역을 공부했던 진수재(進修齋) 서당 ▶ 진수재의 접장이었던 잠계 선생은 장흥, 강진, 보성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였다. 잠계 선생이 계실 때 최고 학문인 주역을 공부하는 학자가 열두 명이나 있었다. 진수재 서당은 그 [문]짜 [창], 진사 아까 방금 이야기한 진사의 아드님. 그 냥반이 함자가 [서]짜, 내가 이렇게 기억이 가물가물해. [서]짜 [휴]. 호는 성암공, 성암. 그 어른이 그러닌까 그 안에 전설에 의하면 그 우게가, 지금 현재 진수재 우게가 저 서당골이라 있습니다. 그래 거가 수원이 쪼금 있대요. 거기서 서재를 하시다가 밑으로 내려와서 그 냥반 때 [서]짜 [휴], 그 냥반 성암공 때 그 집을 학당을 지었었요. 그래가지고 지금 오늘 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중년에 치우락 해가지고 새로 개축을 ..

용산면 2017.09.19

[용산면] 부용산 물이 흐르는 넓은 들에 사는 일곱개 마을 칠리안속

부용산 물이 흐르는 넓은 들에 사는 일곱개 마을 칠리안속 ▶ 부용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월림천을 따라 소쿠리 형국의 일곱 개 마을로 흐른다. 이 소쿠리 형국에서 일곱 개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해서 칠리안속이라 한다. 다 칠리 그러믄 그 사신 분들의 역사는 각기 다르고, 내가 아는 것하고 또 다를 것인디 어떻게 내가 얘기를. 허허허. 칠리란 소리는 이 병같이[두 손을 둥그렇게 만들며] 용산면 여기를 딱 놓고 보면은 냇이 흘러. 쩌기 저 부용사 있는데, 부용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월림천 그쪽에서 내려오는 그 물을 딱 놓고 보면은 이 안이 병만이로 소쿠리만이로 딱 그렇게 되야 있어요. 여가 이게 그런 형국인데 이 형국 안에가 일곱 마을이 있닥 해서 칠리라고 부르는 것이지. 뭐 칠리라는 역사는 따로 있는 건 ..

용산면 2017.09.19

[대덕읍] 처음에는 우리 마을을 새터라고 불렀어

처음에는 우리 마을을 새터라고 불렀어 ▶ 현 대덕 신기마을은 월정, 내동, 초당, 축내, 거정과 함께 신월리 6개 부락 가운데 하나였다. 신월리가 6개 마을의 행정 단위로 나뉘면서 마을 이름이 처음에는 ‘새터’였다가 나중에 한자어인 신기(新基)로 바뀌어서 지금의 신기마을이 된 것이다. 인자 처음에는 우리 부락이 신월리 6개 동에서 각 부락으로, 자연부락으로 이리 나눠졌어요. 그래서 인자 월정, 내동, 초당, 축내, 거정, 신기 그래서 6개 동으로 이렇게 나눠졌는데, 우리 부락이 떨어지면서 ‘새터’라고 불렀어, 인자. 처음에 떨어질 때는 새터라고 불렀는디 그거이 쪼끔 인제 자연부락, 행정으로 이렇게 넘어가면서 인제 신기부락. 그래서 인자 새로울 신(新)자 터 기(基)자를 써서 인자 신기부락으로 칭이 된 거..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마시면 병이 나았던 오성산 약수

마시면 병이 나았던 오성산 약수 ▶ 신리와 오성산 사이에 골짜기가 있는데, 예전에 거기에 약수터가 있었고, 거기서 나는 물이 좋다고 알려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들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논이 들어서 있다. 오성산 앞에가요, 우리 신리하고 사이에, 오성산 앞에가 우리 신리마을하고 사이에 말하자면 골짝이 있어요. 거기에 물이, 약수가 있다고 그랍디다. 나병 환자나 어떤, 지금으로 말하자면 결핵 환자 같으면 그 물을 먹으면 좋다고 해가지고 상당히 거가 약수터가 있었던 모양이여. 그래갖고 우리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 아마 거기서, 오성금 앞에 집이 몇 가구가 있었어요, 우리 알기에도 있었어요. 그라믄 우리 어려서 그 집이 없어지고 그 샘도 없어지고 그랬어요. 그란데 지금은 우리가 ..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연평마을은 바닷배 형국

연평마을은 바닷배 형국 ▶ 예전에 대덕을 ‘번덕’(넓고 평평한 땅)이라 했다. 대덕의 한 마을인 연평마을은 바닷배 형국으로 되어 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줄다리기를 하곤 했다. 전에 들어보믄 여 대덕 보고 번덕이라고 하더란께, 번덕(번덕지? 평야?). 그란데 뭐, 그런 거 알아서 뭐 하게? - [번덕이라고 한 것도 이유가 있어.] 그라제, 이유가 있제. …여그 마을이 저, 배 상국으로 돼갖고 요 동네, 마을이 배 상국이 됐어, 배 상국. - (배 형국. 배 배, 바다 배요? 바다 배 모양으로 생겼어요?) 이이, 그랬다 하더만, 바다…. - [자네는 누가 가르쳐줘서 알았는가?] 아따 그 전에 그라더만, 배 상국으로 됐는께…. 보름날이믄 줄을 당거, 배 상국이라. - (아, 그럼 매년 ..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도깨비랑 아조 큰 실랑이를 했다 하대

도깨비랑 아조 큰 실랑이를 했다 하대 ▶ 구술자가 어릴 적, 동네에 기골도 장대하고 힘도 아주 센 할아버지가 살았다. 어느 날, 이 할아버지가 밤길을 걸어 집으로 오는데 웬 사람(도깨비)이 나타나 씨름을 하자고 해서 큰 실랑이를 벌이다가 허리띠를 끌러서 그이를 묶어놓고 오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어찌 되었나 궁금하여 그 자리를 찾아가봤더니 빗자루 하나가 할아버지의 허리띠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 [웃음] 박우이 즈그 아버지가 속은, 우리 친정 동네요. 내 에려서여, 에려서 에려서…. 저, 신상. 대리, 저 신상. 그란디 그 할아버지가 젊어서 장대하고 겁나 세고 아조(아주) 그 힘도 좋고 그란 할아버지라게. 그란 할아버지여. 그란디 그 할아버지가 밤에 어디를 갔다 온께는 아~조, 어디 뭔 사람이 아조 달라..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정성 들여 소원을 빌던 원무덤재

정성 들여 소원을 빌던 원무덤재 ▶ 현재 대덕읍내에서 신리로 오는 큰 도로가 있던 자리에 예전에 샛길이 나 있었고, 여기에 ‘원무덤재’가 있었다.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정성 들여 돌을 쌓아놓고 원(願)을 빌고 하면서 돌무덤이 생겨나서 원무덤재로 불렸다고 한다. 다르게 전해지는 말로는 돌아가신 원님을 묻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도로가 닦여서 사라지고 없다. 우리의 지금 면 소재지가 옛날에도 현재 대덕읍 소재지, 면 소재지. 읍사무소 있는 데가. 옛날에 길이 나뻐 갖고 샛길이라 안 하요? 지금 현재 신작로가 나고 그 뒤로 인자 포장이 되고 오늘날은 2차선이지만, 다른 데도 그리 됐지만은. 그때에 정상적으로 그 재가, 돌무덤이 있었어요, 한마디로 그 당거리라 하는가요? 그람서 여기서 ..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간이학교도 못 됐던 강습학교

간이학교도 못 됐던 강습학교 ▶ 일제강점기 말엽, 대덕에 국민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없는 학교였다. 그래서 거기에 학생 수가 적어서 ‘강습학교’라고 부르는 작은 부속 학교를 하나 설립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초등학교에 1부생만 있었는데, 해방 즈음에 2부제가 실시되면서 2부생이 생겨났다. 해방 전후하여 이렇듯 2부제 의무교육 체제로 바뀌면서 강습학교는 폐쇄되었다. 인자 국민학교 한나밖에 없제, 여기가. 그때도 일제 말엽이니까 돈 있는 사람이 거기도 들어가고 학생들이 시험 봐서 거그를 들어가요, 모지란께 못 가고. 그래가지고 학교 간 사람이 귀했제, 그때만 해도. 그랬는디 거기다가 학교를 조그맣게 설립을 했어. 그 학교가 인자 간이학교도 못 되고, 급수가. 강습학교라고 그랬제, 강습학..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누에머리 산봉우리 형국을 한 잠두

누에머리 산봉우리 형국을 한 잠두 ▶ 잠두(蠶頭)라는 이름은 이 마을의 대창이라는 데에 있었던 산봉우리가 누에머리 모양을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뉘대빡’, ‘뉘머리’로도 불리는 이곳을 주민들의 지형에 대한 애착심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도 헐지를 못했는데, 70~80년대 간척지를 막으면서 흙을 팔기 위해 이 봉우리를 헐어버린 후로 그 산과 밭을 팔았던 이들이 모두 죽어버리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잠두(蠶頭)라는 지명은 옛날에는 지형을 따라서 그 마을을 이름도 짓고 모두 그란 것인디, 잠두가 대창이라는 데가 이 산 봉우리가 있었는디, 지금은 간척지하면서 깎아 내려 버렸는디, 봉이 있었어요. 거(기)가 잠두리가 누에 행국(형국)이라, 누에 행국. 거기가 누에머리여. 대창 산이 누에머리여. 그래서 뉘대빡(누..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선창이 크다 하여 대창

선창이 크다 하여 대창 ▶ 일제강점기 때, 대덕읍내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선창이 크다’고 하여 ‘대창(장)’이라 불리는 시장이 서곤 했다. 규모가 큰 장이라 늘 장꾼들로 북적였던 대창(장)은 근처 섬에서 가장 가까운 시장이기도 해서 농사를 짓지 않는 섬사람들이 부족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찾던 곳이었는데, 이후 시행된 간척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3.5키로나 될 거여, 거기가. 그랬는디 거기가 일제 때, 해방 후로까지도 도로가 개설이 안 되고 그럴 때는 이 섬사람들이, 도서 사람들이 식량을… 거기는 농사를 적게 짓지 않아요, 식량이 항상 부족해. 그란께 식량을 육지 와서 갖다 사다 먹어야 쓰는디 도서 사람들이 이 시장이 제일 가까운 데가 대창(大艙)이에요, 대창. 다른 데 저 더 ..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강진군과 장흥군의 군계인 분토마을

강진군과 장흥군의 군계인 분토마을 ▶ 분토(分土)마을은 예전에 지금의 마을 뒷산 쪽에 있던 송촌과 이촌이 차츰 물가로 내려와서 정자나무 세 그루를 심고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장흥군과 강진군의 경계에서 두 군을 나누는 땅이라 하여 ‘분토마을’이라 부른다. 옛날에 우리 마을은 한 500년 전에 송촌과 이촌이라는 데가 있었어요. [산쪽을 가리키며] 저 위에가 송촌이라는 데가 있고, 이촌이라는 데가 있었는디 거기서 살다가 차츰차츰 물갓으로(물가로) 내려와서 정자나무도 심은 데가 한 4~500년, 400년 이상 될 거요, 400년 이상 될 거요. 그 나무가 세 그루가 심어졌는데 그래가지고 여기가 강진군, 장흥군 군계로 되어 있단 말이요. 강진군, 장흥군 군계로 되어 있는디 저기 저 지제거리라..

대덕읍 2017.09.19

[대덕읍] 징한 시상 살었어

징한 시상 살었어 ▶ 스무 살 때 회진 장산에서 이곳 대덕 가학으로 시집왔다. 오기 싫었는데 아버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시집을 와서 보니 방도 없는 골짜기 오두막집이었다. 그 굴 같은 방에 손베틀을 두고 베를 짜라고 해서 베를 짜면서 살았다. 참으로 매운 시집살이였다. 보리방애를 한나 물 붓어갖고 찌근디(찧는데), 시집을 요리 오기 싫은께 막 운께 어디로 달나 부렀어. 그란께는 우리 아부지가 도치(도끼)를 갖고 쫓아오더란 말이여, 억지로 요리 보낼라고. 그래갖고 무서워서 요리 시집왔당께, 억지로. 그래갖고 온께는 황토 골짜기 그 오두막집, [청중들 웃음] 워메워메… 방도 없는 데다가 시집보내갖고… 징한 시상 살었어, 아조. 그 굴방에다 손베틀 짜놓고 베 짜고. 어이구! - [그래도 따숩긴 따숩….] ..

대덕읍 2017.09.19